프로 레슬링이 따르는 건
규칙이 아닌 시나리오다.
거기에 담긴 ‘게임의 법칙’은
‘규칙을 무시해서 이기는 것’이다. 얼마 전 지율 스님이 전화를 걸어오셨다. 한숨을 폭 내쉬신다. 그날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아니면 말고’ 선동, 3진아웃 시켜야)을 보시고, 말 상대가 필요하셨던가 보다. 칼럼은 스님의 350일이 넘는 5차례 단식을 혹세무민의 전형으로 몰아붙이며, 스님의 4대강 파괴 반대 활동을 천성산 선동꾼의 기술 진화쯤으로 치부했다. 차라리 다이어트 단식이었다고 하지 그랬을까. 그러고는 “(선동의) ‘전과’가 세 차례 쌓이면 추방 명령을 내려야 한다”며 기세등등하게 끝을 맺는다. 추방을 명령할 수 있는 조선일보는 한국사회의 진정한 규율권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식적인 커밍아웃이기도 하다. 칼럼은 스님과 관련한 그간의 정정보도들은 다 제쳐둔 채, 정정보도 대상이었던 왜곡된 사실을 재인용했다. 물론, 그러고도 필자 자신과 조선일보는 3진아웃에서 예외다. 그렇기에 칼럼은 또한 방언처럼 어지러운 독백이다. 언표의 행위는 있지만 어떤 뜻도, 소통의 의지도 없다. 독백의 소음이 담론의 장을 집어삼킬 뿐이다. 소음에 갇힌 이가 어디 스님뿐일까. ‘광우병 괴담’에서 ‘참을 수 없는 순정’으로, 다시 ‘좌파의 준동’으로 표변을 거듭했던 조선일보가 2년 뒤 촛불들의 거짓 자백을 받아낸 것도, 그런 조선일보를 극찬한 대통령이 자신의 반성문은 버리고 국민의 반성문을 대신 요구한 것도, 국회의원이 국민 알권리를 위한답시고 전교조 교사들의 신상을 발가벗긴 것도 모두 폭력적 독백이다. 이런 한국사회의 풍경을 환유할 수 있는 스포츠는 프로 레슬링뿐이다. 이를테면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이 ‘의리’ 운운하며 법원이 제재를 가하기 직전까지만 전교조 명단 공개를 계속하는 건, 링 둘레에서 심판 얼굴 봐가며 반칙을 일삼는 태그매치의 풍경 그대로다. 심판이 사소한 반칙을 꼬투리 잡으며 뒤에서 벌어지는 더 큰 반칙은 못 본 체하는 장면도 우리 현실에서는 무척 흔하지 않던가.
프로 레슬링이 따르는 건 규칙이 아니라 시나리오다. 그 시나리오 안에 담긴 ‘게임의 법칙’은 ‘규칙을 무시해서 이기는 것’이다. 반칙은 게임의 일부, 아니 핵심이다. 프로 레슬링의 시나리오가 반칙을 중시하는 건 악인 캐릭터가 오히려 인기를 끌기 때문이다. 관중은 피떡이 된 찰나적 승패보다는 시나리오에 따라 난장판이 돼가는 과정에 몰입한다. 그 사이 선악의 분별은 사라지고 탈현실화된 스펙터클만 남는다. 한국사회가 반칙사회라는 언설은 사실 진부하다. 중요한 건 어쩌다 프로 레슬링을 닮아버린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현실에 재현한 혐의가 짙다는 점이다. 이 사회의 지배세력이 거리낌없이 반칙을 하는 것도 이미 그들 자신을 게임의 캐릭터로, 그들의 불법·편법을 게임의 일부로 시민들 내면에 판타지화했다고 보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들은 악인으로 태어났다기 보다, 기꺼이 악인이 되는 것이다. 지방선거라는 빅 매치가 눈앞에 있다. 반칙지수도 계속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한동안 유효했던 반칙 전략이 이번에도 먹힐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두박근에 새긴 ‘차카게 살자’ 문신이 눈에 거슬린다. 프로 레슬링에서 악인 캐릭터는 관중에게 훈계하지 않는다. ‘나처럼 착하게 살라’고 외치는 순간 판타지가 깨지기 때문이다. 물론 반성문을 요구하는 일은 더욱 없다. 프로 레슬링의 기원은 영국 장터의 광대놀음이다. 현실을 풍자하는 코미디 장르다. 캐릭터 자신이 시나리오와 현실을 엄격히 분별하지 못하면 풍자의 입각점은 사라진다. 예를 들어 학살과 항쟁의 현장인 5·18 기념식장에 축하 화환을 갖다놓고 방아타령을 울리는 촌극에는 카타르시스가 없다. 지금 관중은 떨떠름해져서 자리를 뜨는데, 캐릭터들은 오히려 판타지에 취해 ‘북풍’이라는 삼지창 포크를 바지춤에서 꺼내고 있지 않은가. 안영춘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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