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은
아메리칸드림에서 비롯된다.
노무현의 나침반이었던
유러피언드림을 다시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년이 오고 있다. 까마귀도 먹을 게 없어 되돌아가는 산골에서 두 손 불끈 쥐고 세상에 나왔다가,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나간 이 시대의 풍운아 노무현. 차별과 소외, 특권과 반칙이 지배하는 세상을 바꿔 보자고 온몸을 던져 절규했던 그의 웅변이 아직도 귓전을 때리는 듯하다. 비록 그의 하드웨어(육신)는 갔지만 그의 소프트웨어(정신과 가치)는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꿈틀거리고 있다.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가 서거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고 탐독하며 주변 지인들에게 많이 권한 책이 있다. 미국 미래학자인 제러미 리프킨이 쓴 <유러피언드림>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열망했던 비전과 가치를 읽을 수 있는데, 아메리칸드림에 회의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칸드림은 자유경쟁, 효율성, 문화적 동화, 부의 축적과 성장, 수적 다수와 우위로 승부와 성패를 거는 가치체계를 담아낸다. 이런 가치 패키지는 사회경제생활에서나 정치생활에서 승자독식과 패자전몰, 완승과 완패 현상을 잉태한다. 미국 사회를 보라. 선진국에 걸맞지 않게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이 만연돼 있고 인종적 편견과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대선 승자가 연방 권력 모두를 장악하는 미국 정치는 국론 분열로 인해 ‘아메리카합중국’을 ‘아메리카분열국’으로 바꾸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은 아메리칸드림에 의해 디자인되어 왔다. 특히 엠비(MB) 정부의 ‘선진화’ 비전은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 차별, 소외, 배제는 아메리칸드림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 전 대통령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고뇌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메리칸드림을 뛰어넘는 새로운 국가비전으로 유러피언드림을 꾼 것이다. 유러피언드림은 자유경쟁보다는 협력과 연대, 효율성보다는 형평성, 동화보다는 문화적 다양성, 부의 성장보다는 삶의 질, 수적 우위 게임보다는 다수파와 소수파 간 상생 게임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이러한 원리와 가치에 따라 유럽의 사회경제 시스템과 정치 시스템은 돌아간다. 즉 사회경제 파트너들 사이 네트워킹이 정당 간 교차 파트너십으로 이어지고, 정치적 타협은 사회경제적 타협의 버팀목이 됨으로써 다양성과 통합성을 조화시키는 다사불란(多絲不亂)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를 통해 보육·교육·의료·요양·복지·문화·환경 등의 다양한 공공 서비스가 차별과 소외 없이 모든 시민의 일상생활 속에 녹아내린다. 아메리칸드림의 안티테제인 유러피언드림이야말로 노무현에게 21세기 ‘인간의 얼굴을 가진’ 대한민국을 창조하는 나침반이 됐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국정운영은 노동, 공교육, 의료, 환경, 문화, 저출산, 고령화, 차별, 빈곤, 양성평등, 국가 균형발전 등 다양한 국가 어젠다에 관해 여러 이해관계자, 전문가, 시민단체가 참여한 사회적 대화와 협의 시스템을 작동시켰고 ‘동반성장 담론’과 함께 공공 서비스를 집대성한 ‘비전 2030’을 이끌어냈다.
또 노무현의 유러피언드림은 유럽 정치의 본령인 연합정치로 나타났다. 아메리칸드림이 상정하는 경쟁과 수적 우위로 승부가 가려지는 위다척소(衛多斥少)의 정치가 아니라 상생하는 ‘모두스 비벤디’의 정치를 갈망했다. 이를 위해 그는 소수파에게 도움이 될 비례성이 높은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을 원했고 이를 반대하는 한나라당을 설득하기 위해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연정 파트너의 ‘문패’를 잘못 노크하는 실수를 했지만 한국 정치에 낯설기만 한 연정의 씨앗을 뿌리려고 노력했다. 자고로 시대를 앞서 가는 선각자의 길은 평탄치 않았다. 노무현 유러피언드림의 길도 아메리칸드림 세력의 저항으로 파란만장했다. 그래도 하늘나라의 노무현은 대한민국 미래가 유러피언드림의 길로 가고 있는지 내려다보고 있으리라. 선학태 전남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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