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 앞에서 난 왜
부끄러움으로 돌아서야 했나.
순천시·사천시 문화재 위원들은
왜성 복원의 저의를 설명하라 신록이 참 아름다운 5월이다. 금수강산이라는 우리 땅의 수식어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이 계절에, 지난 16세기 말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저질러진 임진·정유 두 왜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남해안을 돌면서, 난 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는가를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마음을 안고 돌아왔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땅은 어떤 발자취를 지니고 오늘에 이르렀는지, 내 후손에게 어떤 자세를 물려줘야 할 것인지를 명확히 알고 행하는 일이 경제적인 문제의 해결 이상으로 중요하다. 두 왜란으로 우리 땅과 국민이 겪었던 고통은 말로 다 헤아리기 어렵다. 그들은 부산으로 침입한 지 한 달도 안 돼 한양을 함락시켰고 곧이어 평양성까지 손에 넣고 1년 가까이 우리나라를 통치했다. 침략한 다음 해인 1593년 조·명 연합군에 의한 평양성 전투와 권율 장군이 이끄는 행주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약 11개월의 서울 점령을 끝내고 부산 쪽으로 퇴각했다. 그러고 나서 지어진 것이 울산에서 사천까지 이르는 바닷가에 쌓은 일본식 왜성이다. 왜인들은 정유재란까지 경상도 바닷가에 지어진 왜성을 거점으로 명나라와 회담을 계속했다. 그 뜻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재침을 시도하면서 바닷가를 요새화하는 전략을 시도했다. 그렇게 쌓은 왜성이 경상도에 29곳, 전라도 순천에 1곳으로 모두 30곳에 이른다. 1910년 한·일 병탄으로 일본인들이 다시 우리를 식민통치하면서 총독부는 두 왜란 때 서울에서 약 1년 동안 자신의 선조들이 조선을 통치했던 흔적을 찾았다. 전국에 산재해 있던 우리나라의 기존 성(城)인 ‘읍성’은 대부분 파괴시키고 대신 왜성이 있던 울산에서 순천까지의 왜성터를 찾아내 성의 기단부를 복원하여 사적지로 지정해 놓았던 것이 2000년대 중반까지 이르렀다. 그것이 최근 ‘사적지’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사적지에서 파기됐으나, 지방에서는 관광지 조성이라는 명분으로 지방 유적지로 둔갑시켜 놓았다.
일본학을 전공한 나는, 메이지(명치)기에 일본에 남아 있던 우리 고대 유적지를 그들이 대부분 없애버리는 등 고대에 우리 선조들에 의해 그들의 문화가 성장발전했던 역사를 지워버리려 했던 사실들을 잘 알고 있기에 왜성을 돌면서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천시와 사천시 그리고 울산시 등은 사라진 왜성을 찾아내 관광지 조성이라는 명목으로 엄청난 세금을 써가며 다시 복원해 놓았다. 사천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식민시기에 심어놓았던 총독부의 벚나무만으로도 부족한 듯 왜성터에 올해 다시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벚나무를 빼곡히 심어놓았다. 확실한 증거자료도 없이 성문 자리였다며 일본에 있는 ‘히메지성’ 문을 본떠 어설픈 왜성문을 설치해 놓기까지 했다. 왜곡된 침략 역사를 제대로 보고 알고 싶어 찾아온 일본인들 앞에서 난 해설보다는 부끄러움만 가득 안고 돌아선 시간이었다. 순천시와 사천시는 그리고 문화재 위원들은 없어진 왜성을 복원한 저의를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 이금복 한·일 역사문화 해설가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