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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10 16:53 수정 : 2005.06.10 16:53

21세기의 아이들을 20세기의 학교에서 19세기의 선생님들이 19세기적인 사고와 가치관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이 상황에서 학생과 학교는 행복해질 수 없다.

지난 6일 새벽 충북 옥천의 한 중학교 교감선생님이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위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교감선생님의 부인은 교육감의 학교 방문에 따른 과잉 영접 문제로 남편이 몹시 괴로워했으며, 이런 교육 당국과 학교의 권위적 태도 때문에 남편이 자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가장 개방적이어야 할 학교가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문화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사건은 학교의 이런 문화가 겉으로 드러난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러한 학교의 권위적인 문화가 학교사회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까지 강요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머리 모양·길이 제한 규정이 있었던 그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두발 제한을 완화하기 위한 의견을 폈다. 학생회를 통해 자율적으로 그 제한을 만들고 이를 지키지 않을 때 어떤 처벌을 받을 것인지 구체적으로 명시한 내용을 학교 어른들께 말씀드렸다고 한다. 학생들 스스로 문제를 느끼고 토의를 거쳐 대안을 만들어 제시하고, 이것이 학교에서 받아들여졌을 경우 학생회를 통한 학생들의 의견 수렴으로 학내의 의견을 해결하는 좋은 선례를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 어른들은 사무실의 화분을 던지는 것으로 학생들의 요구에 대한 답을 하셨고, 결국 학생회를 통한 모든 문제 해결의 가능성도 봉쇄돼 버리고 말았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어떤 존재일까? 내가 보기에는 상호 협력자 또는 동반자 관계이기보다는 학생은 선생님들의 통제 대상으로 느껴진다. 자치 활동을 하기에 제약이 너무도 많고, 제대로 된 의사표시를 할 수 없으며, 결국 학생들은 스스로 제한을 두고 자신을 통제하고 만다.

얼마 전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에 대한 어른들의 태도 역시 권위적이기 그지없었다. 어른들은 고교생의 집단화·세력화를 걱정하며 ‘고등학교판 한총련’이 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으며, 이런 여론을 인식한 예술의 전당 쪽은 장소를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 학생들은 어른들을 겨우 설득시켜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그런 모임을 만들게 되기까지 어른들이 지녔던 권위주의적이고 닫혀 있는 사고에 대한 반성 없이 관심과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또 큰 상처를 주고 만 것이다.


열린교육, 학습자 중심을 목이 쉬어라 떠들면서도 뒤에서는 여전히 학교를 닫힌 구조 속에 방치하고 학생들을 옥죄는 학교와 어른들의 생각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내가 학교를 다닐 때, 우리 아버지 세대가 학교를 다닐 때와 현재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를 비교하면 틀·내용·방향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 흔히 하는 말처럼 21세기의 아이들을 20세기의 학교에서 19세기의 선생님들이 19세기적인 사고와 가치관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이 상황에서 학생과 학교는 행복해질 수 없다.

가고 싶은 학교,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학교, 살아 숨쉬는 학교를 꿈꿔본다. 하지만 꿈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학교의 선생님들이, 학부모들이, 나와 같은 예비 교사들이 하나씩 바꾸어가지 않으면 우리 아들딸들은 교실 이데아를 꿈꾸며 어른들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학교가 바뀌어야 한다. 권위주의의 탈을 쓴 관심과 걱정과 통제는 이제 벗어버리고 사랑과 대화와 소통이 있는 학교로 만들어가자. 내가 가르치게 될 학생이, 내가 나은 자식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꿈을 더욱 키우고 웃음을 배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이광영/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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