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생에 동네 찌꺼기 다 모였다”
선생의 말에 모두 웃었다
개학 첫날 첫시간마다 “대학 대학”
생략된 그 뒤엣말은
“그럼에도 쓰레기가 될 것이다” 오늘따라 교문을 나서니 바지 밑단만을 쪽 줄인 남자 아이들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보이는 치마를 입은 여자 아이들이 한 데 모여 재잘거리고 있었다. 사실 ‘재잘거린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 한 무리의 군중이 내뱉고 있는 것은 ‘소음’과 가깝다. 나는 그 속에서 아까 선생이 한 말을 곰곰 생각하여 보았다. “신입생에 동네 ‘찌꺼기’는 다 모였다.” 고교선택제가 실시되고 첫 해가 되는 이번 년도, 학교 측에서는 미달이 안 되었다고 좋아했단다. 그러나 그 결과가? ‘찌꺼기’. 선생의 말에 모두는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그 모두가 불쌍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학 첫날이었다. 오리엔테이션을 가장한 모든 과목의 설교 시간에서 선생들은 일렬적으로 입을 앞으로 모으고 말했다. ‘대학’, ‘대학을 잘 가려면’, ‘수시·수능’ …. 단지 같은 단어군의 무한대 늘어짐만이 있었을 뿐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너희는 ‘한국의 고삼’이며, 그것이 너희의 명세표이다.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은 필요가 없다. 그건 경제성의 원리에 해가 될 뿐이다. 군림하든지 종속받자. 사용하든지 부품이 되어라. 물론 너희들 거의는 부품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1%는 다를지 모른다. 전자의 것을 선택할 수 있는 1%. 오해는 마라. 1%는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너희를 조각하겠다. 그러니 시키는대로 공부를 해라. 대학을 가라. 이미 과포화치인 저 좁은 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파해라.” 나는 그 뒤엣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쓰레기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집에 가는 길에, 선생이 말한 교문의 ‘찌꺼기’들 뿐만 아니라 냉랭한 얼굴로 움직이는 회사원들을 보며 ‘여기는 시체들의 섬’임을 확인했다. 나이가 몇이세요? 열아홉이요. 아, 그럼 고삼? 공부해야겠네. 아무도 내게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하려 하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관례적이며, 그들이 실제라고 믿는 ‘형식-겉껍데기’를 물었다. 어떤 옷의 조직감과 감상보다는 ‘브랜드-네임 밸류’를 말했고 또 믿었다. 일곱시 반까지 자리에 출석하여 피곤한 얼굴로 자습서를 들여다보고 있는 얌전한 ‘순응자’들. 선생의 이율배반적인 말에 착하게 웃으며 호응하는 그 자체로의 아릿함, 혹은 교문 앞에 제 자신의 미숙함에 취해 웅성이는 ‘찌꺼기’들. 나는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입을 꾹 다문 채 무료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과연 누가 ‘찌꺼기’인가? 아니, 누가 ‘찌꺼기’를 만들어냈나? 오나영 서울 금천구 시흥4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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