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복장 규율·선후배 위계
잘 권리·놀 권리 반납하게 하는
교육이란 이름의 폭력
누가 아이들의 행복권을 빼앗나 이마에, 뒷덜미에 아직도 솜털 보송보송한 중학교 신입생들이 입학했다. 사춘기에 막 접어든 초등학교 6학년은 선생님들을 하도 애먹여서 서로 맡지 않으려 한다지만, 어떤 집단에서도 그렇듯이 신입생은 귀엽고 신선하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아이들은 잔뜩 주눅 들어 있다. 중학생이 되면 아이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용의 복장 규정의 틀에 맞추어진다. 아침이면 군대의 위병소 같은 교문을 통과하면서 검열을 거친다. 하교 때까지 아이들은 상급생의 눈초리를 요령껏 피해야 한다. 미래의 주역을 기르는 곳이 어찌 보면 군대나 감옥의 변화보다 더 구태의연하다. 막 입학한 아이들은 초등학교와 너무 달라서 얼떨떨해한다. 시간마다 선생님도 바뀌고, 교복도 입고, 말로만 듣던 선배들을 깍듯하게 대해야 한다. 우리 학교들이 좀 친절할 수는 없을까? 달라진 생활에 어떻게 쉬이 적응할지, 얼마나 즐겁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는지, 정신적 성장통은 어떻게 겪어 나갈지, 꿈은 어떻게 키워갈지 세심하게 안내하는 새내기 배움터를 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섬세한 배려와 거리가 너무 멀다.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우리는 다짜고짜 시험으로 맞이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진단평가가 전국 동시에 3월9일 실시된다. 학력 신장이란 이름으로 입학을 환영하듯 치르는 시험은 참으로 몰인정한 정신적 폭력이다. 어디 아이들에게 교육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이 이뿐이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인 잠과 식사는 어떤가. 청소년기 성장 호르몬이 분비되는 밤 10시 이전에 자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8시간 이상 자는 아이들은 열에 한둘이다. 잠에 취해 아침을 못 먹는 아이도 부지기수다. 게다가 저녁을 제대로 챙겨 먹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저녁 식사 시간에 아이들은 학원에 가 있다. 짧은 시간에 그들은 김밥, 떡볶이, 빵 쪼가리로 대강 때운다. 사실을 말하자. 우리나라도 1991년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18살 미만)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제24조에서 “당사국 정부는 아동이 최상의 건강 수준을 누릴 수 있도록 아동에게 적절한 보건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한다”고 하고, 제31조에서는 “모든 아동은 적절한 휴식과 여가 생활을 즐기며, 문화 예술 활동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언제 아이들한테 공부할 의무 외에 ‘놀 권리’를 주어 보았던가? 아이들을 같은 인격체로 보고나 있는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둘러싸고 말들이 참 많은 게 현실이다. 왕따다, 집단 폭력이다 일만 터지면 아이들 심성이 거칠어졌다고 난리들이다. 졸업식에 옷 벗기기 축하를 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끌려 나가는 아이들이다. 과연 어느 나라에서 아직까지 중·고등학교 선배가 선생님이나 부모님을 넘어 ‘하느님과 동격’으로 무서운 존재인가? 수직적 권력 구조 속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길들이는 걸 아이들은 어디서 배웠을까? 경쟁의 무기인 지식 말고 인권과 평등과 민주주의는 어디서 가르치고 있나? 학년 말이 되면 교문에 펼침막이 걸린다. 특목고나 자사고 같은 이른바 명문고에 들어간 영광의 이름들이다. 이름이 없는 아이들은 어쩌면 존재가 없는 아이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습된 아이들은 죽기 살기로 경쟁에 머리를 들이밀고, 물신 외의 어떤 가치에 대해서도 고민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여 스스로도 가누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남에 대한 이해나 공감, 배려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장래를 위해’, ‘교육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엄청난 압력은 아이들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고 있다. 중압감에 눌린 아이들은 게임 속으로나 도피해 악마나 죽이고, 적을 살해하는 것으로 분노를 겨우 다스린다. 힘없는 선생은 저 귀여운 신입생들의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면서 초롱한 눈망울을 대하기가 영 불편하다. 신연식 서울 동마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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