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과 현실 추수하는 ‘20대 회의론’
실은 훈육되고 길들여진 타자의 욕망
진보의 미래로 예찬받는 ‘패션좌파론’
사회적으로 위험한 존재는 아니다
이제 위험하고 불온한 좌파가 나올 때다 이 글은 ‘요새 젊은것들’에 대한 글이다. 오늘날 진보적 담론의 공간에서 20대를 바라보는 담론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하나는 ‘청춘 예찬’으로서 386의 거대담론에 물들지 않은 ‘포스트모던한’ 인식의 소유자로서 20대를 바라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대 회의론’으로서 20대의 탈정치화와 20대 자신들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조직화하는 능력의 부재를 문제 삼는 담론이다. 그러나 이 두 담론은 20대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폄하함으로써 실제로는 현실의 ‘20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20대의 한 사람으로서 ‘20대의 권리와 한계’를 명확히 하고, 이를 통해 현실의 ‘20대 문제’의 해결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 주 도전 대상인 흄의 회의주의에 해당하는 ‘20대 회의주의’부터 검토해 보도록 하자. 사실 ‘20대 회의주의’는 그 비판의 측면에서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 이전 세대가 보기에 20대는 ‘스펙’ 쌓기와 자기계발에 몰두하며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등한시하고 개인주의적이며 현실순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20대의 ‘현실순응주의’는 사회구조적, 제도적 문제가 재생산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20대 회의론’은 순응주의적인 20대의 욕망이 실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러한 20대의 욕망은 사실은 그들의 부모로부터, 선생으로부터, 텔레비전과 광고들로부터, 끊임없이 훈육되고 길들여져 만들어진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의 생성 구조를 파악하지 못한 채, 모든 문제를 20대의 무능력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20대 회의주의’보다 더 심각한 것은 ‘청춘 예찬’으로서 ‘뉴 타입 진보’ 또는 ‘신좌파’를 찬양하는 담론들이다. 이들은 무능력과 현실순응주의라고 불러야 할 20대의 특징들을 ‘패션 좌파’ ‘좌파 간지’ ‘진보의 미래’로 예찬하면서 희망찬 전망을 내놓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예찬론자들은 마치 20대가 ‘이데올로기’ 또는 ‘거대담론’과 무관한 듯이 말하지만, 사실 이들 ‘신좌파’만큼 자본주의-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농락당하는 사람들도 없다. 이들이 ‘패션 좌파’ ‘좌파 간지’의 이데올로기성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력하게 20대의 감성과 욕망을 사로잡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신좌파’는 ‘섹시’할 수는 있어도 결코 불온하거나 위험하거나 혁명적인 존재가 되기에는 무리이다. 사실 ‘패션 좌파’의 욕망은 곧 20대의 자기계발 욕망과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순응주의적인 좌파가 인기를 끌 수 있다는 사실은 진보세력의 무능력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패션 좌파’들은 권위주의적인 ‘구좌파’를 비판하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 그러나 권위주의를 비판하면 뭘 하나.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패션 좌파’는 정말 간지러운 소리일 것이다. 차라리 ‘구좌파’는 그 자신이 활발히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는 사회적으로 ‘위험한 존재’였다. 요즘의 ‘신좌파’들은 ‘구좌파’를 비판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교조주의의 미몽’에서 깨어난 존재인 양 행세하지만, 솔직히 ‘신좌파’야말로 이제 백일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러나 내가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구좌파의 권위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하고, 이제 이런 권위주의적 좌파의 가능성은 없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는 선배 세대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우리는 더욱더 위험해져야 하고 급진적이어야 한다. 이제 ‘급진적 좌파의 창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80년대 구좌파처럼 ‘위험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제 20대 중에서도, 위험하고, 도덕주의와 권위주의를 비웃고, 불온하고, ‘미친’ 좌파들이 나올 때이다.
김상범 서울 서초구 서초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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