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평화협정이라는
큰주제를 자신감있게 던졌다
우리와 미국은 비핵화와 평화협정
모두 얻을 수 있는 길 찾으면 돼 최근 북한이 평화협정 회담을 제의했고 우리 정부와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최근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의 흐름이 이런 식이다. 북한은 적극적이고 우리 정부와 미국은 그다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장거리 로켓 발사와 2차 핵실험 등 도발적 행위를 일삼던 북한이 하반기 들어서는 현대 쪽과 개성관광 재개 합의를 하면서 유화적인 분위기로 돌아섰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당시 북한 조문단이 전한 정상회담 의사는 달라진 북한의 입장을 더는 명료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초청하고, 이번에 평화협정 회담을 주장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북한의 변화된 태도를 남한과 미국에 대한 구원요청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북한의 합리적인 계산에 의한 전략적 접근이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은 불안 상태였다. 김정은으로의 승계작업과 그에 따른 내부체제 단속이 필요했고,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핵실험은 이를 위한 것이었다. 하반기 이후 유화적인 태도는 김정일 위원장 건강문제로 야기된 위기를 넘긴 북한이 나름의 발전전략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발전전략의 정점에는 ‘강성대국’이 있고, 이를 완성하는 것은 경제회복과 국민생활안정이다. 올해의 신년공동사설에서 ‘주민생활 향상’을 역설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북한의 변화는 이런 전략에 기여할 수 있는 남한과 미국의 지원을 위한 것이다. 특히 북한의 평화협정 회담 제안은 ‘북한의 여유’로 읽힌다. “남한과 미국의 식량지원 중단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견딜 정도는 되고 우리가 급하게 6자회담에 나갈 이유는 없다. 북-미 관계의 근본문제인 미국의 핵위협 제거를 먼저 논의하자. 그러자면 평화협정 체결 논의를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북한 경제의 성과를 아직 구체적인 통계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북한의 여유는 다양한 모습으로 관찰된다. 시장통제와 화폐개혁으로 비공식 경제를 압박하는 것은 배급이 어느 정도 좋아지는 상황이 아니면 하기 어렵다. 북한에서 시장은 1990년대 중반 대기근으로 인해 배급이 안 되고 주민들이 스스로 식량을 찾아 나서면서 생겨났다. 시장을 막으려면 다른 방식으로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최근 ‘최단기간 안에’ 인민들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것도 군사적으로는 강국 지위에 올라섰지만 인민생활에는 부족한 점이 많음을 인정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 북한이 올해의 가장 중점적인 과제로 연일 강조하고 있는 것이 농업과 경공업의 발전이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작업이다. 군비와 사상무장으로 주민들을 몰아넣는 것보다는 훨씬 자신 있는 모습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비핵화를 접어두고 평화협정을 먼저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화협정 회담을 북한의 ‘초점 흐리기’라고 폄하할 필요도 없다. 북한이 다소간의 여유를 가지고 큰 주제를 던진 만큼 우리 정부와 미국은 이를 계기로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모두 얻을 수 있는 길을 찾으면 된다. 비핵화와 북-미 수교 회담의 동시진행을 추진하는 것은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그 첫 단계는 비핵화와 북미연락사무소개설 협상을 함께 하는 것이 되어야 할 이다. 미국이 이를 꺼리겠지만 평화협정을 앞세우는 북한을 협상장으로 유도할 수 있는 방안인 만큼 전향적으로 생각해볼 일이다. 미국과 민주주의·인권 등 주요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영국은 이미 2001년 평양에 대사관을 개설했다. 미국이나 우리 정부나 선비핵화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에 효과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길을 고민해야 할 때다.
안문석 한서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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