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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03 17:58 수정 : 2005.06.03 17:58

-원폭2세 환자 김형율씨의 죽음에 부쳐

한국 원폭2세 환우회 회장 김형율씨가 지난달 29일 숨졌다. 내가 그를 만난 건 2002년 백혈병 환자들과 글리벡 약값 인하 투쟁을 하고 있던 어느날이었다. 그는 ‘나 또한 혈액 질환자 아니냐’며 갈 곳이 여기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에야 고백건대 나도 처음 듣는 원폭 2세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부터 지금, 그를 중심으로 원폭 피해자와 원폭 2세 환우들의 문제를 풀기 위해 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가 구성되었고,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실에서는 원폭 피해자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진상규명 및 지원을 위해 공대위와 함께 특별법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죽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혀 온 고통이 피폭자인 어머니로부터 대물림되었고, 결국 이 대물림이 제국주의 나라들의 탐욕과 패권주의에 기인한 결과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그는 누워 있던 골방을 박차고 30년 만에 밖으로 나왔다. 그는 회의를 하기 위해 3층 사무실 층계를 올라오려 해도 10여 분을 헉헉거렸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 폐를 찢을 듯한 기침에 시달렸다. 여름에도 찬바람이 무서웠고, 감기에 걸리면 거의 영락없이 폐렴으로 진행되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원폭 문제가 대물림되고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은 거의 죽음에 이르렀던 환자인 그가 목숨을 걸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에게 제국주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되는 진행형이다. 종전 60주년이라지만 그의 삶에는 여전히 방사능 낙진이 삶 전체에 덮여 있었다. 그 속에서 고통의 대물림은 숨죽여 있었고, 어느 누구도 인권은커녕 살려달라고 애원조차 하지 못하다 죽어갔다. 60년 만에 낙진더미 같은 삶 속에서 그가 말했다. ‘살려달라’고.

그러나 원폭을 투하했던 미국도, 침략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수탈하고 학살했던 일본도, 그리고 자국 국민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외면했던 조국도 이 소리를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피해자와 그 자녀들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어서 그 문제를 이야기할 당사자들이 없어지길 원했다. 그 막혀버린 담벽과 같은 차별 속에서 원폭 피해자인 그들조차 혹시라도 자신이 원폭 피해자나 그 자녀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결혼, 취업 등 모든 것에서 불이익을 받을까봐 60년을 그렇게 숨죽여 있었다. 이중, 삼중, 사중의 사회적 차별과 인권유린, 바로 그것이 그가 돌파해내려고 했던 벽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걷어내기에는 그의 폐는 너무 약했다. 일반인들의 4분의 1에 불과한 폐기능을 가지고는 소리치는 것이 너무 힘들었을 게다. 60년을 매장당해온 역사를 3년 만에 밝은 곳으로 끌어내기에는 너무 힘들었을 게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숨이 끊김으로 다시 이 고통의 현실을 고발했다.

이제 그 삶을 우리 모두 다시 전진시켜야 한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사능과 낙진의 고통 속에서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또다른 김형율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원폭 투하 60년, 한-일 협정 40년이 되는 올해 이 유린의 삶, 차별의 역사를 끝장내야 한다.


그가 보내온 모든 전자우편과 그가 쓴 모든 글의 말미에는 항상 이런 말이 있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영정 밑에서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주성/건강세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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