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발언’ 김제동 하차
민주주의 본질적 가치 훼손
연예인들 집단 침묵 안타까워
‘광대’의 자존심 세워야 할 때 지난해 명배우 폴 뉴먼이 타계하자 세계는 한목소리로 애도했다. 그는 존경받을 만했다. 특히 사회에 부를 환원할 때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일찍이 유기농 식품회사를 차려 나온 수익금을 소아암 환자나 제3세계 빈곤 아동을 돕는 데 썼다. 또 암에 걸린 어린이들을 돕고자 꾸준히 여름 캠프를 열었다. 그는 그저 ‘기부 잘하는’ 일개 연예인이나 단순 유명인사에 그치지 않았다. 사회 참여에 소홀하지 않았던 그는 널리 알려진 대로 베트남전에 반대했고 흑인 인권을 적극 옹호했다. 그런 때문이었을까, ‘급진적’이며 ‘자유주의적’이란 이유로 닉슨의 ‘블랙리스트’(enemies list)에 오르기도 했다. 정권과 성향이 맞지 않는다고 ‘적’으로 삼는 권력이 오늘날 우리와 닮았다. 스스로 “비정치적”이라는 사람에게조차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 프로그램에서 쫓아냈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김제동 형 얘기다. 최근 납득 못할 이유로 방송 프로그램에서 물러난 뒤 그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어느 정치인 말마따나 “내공”을 갖춘 그답게도 얼마 전에 만난 제동 형은 ‘인생은 복잡하지 않다. 단지 우리 머릿속이 복잡할 뿐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경구를 비틀어 “난 괜찮은데 남들만 복잡하다”고 태연히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지만, 과연 그렇다. 그가 괜찮을지언정 그냥 넘기기엔 지금 우리들 머릿속이 정말 복잡하다. 하차 이유로 거론되는 정치행위라는 게 고작 전직 대통령의 노제 사회를 보고 정치적 약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일이다. 이런 일에 시비를 건다는 건 민주주의의 오래고 본질적 가치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다. 김제동 하나의 문제를 넘어 이제 우리의 문제, 민주적 가치에 관한 문제가 된 것이다. 가장 답답한 것은 ‘당사자’이기도 한 동종 업계인 연예인들의 집단 침묵이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을 마주해 왜 그들은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광대-딴따라 정신’은 다 어디 간 걸까. 연전 우리가 <왕의 남자>에 열광했던 건 주류에 대한 조롱을 서슴지 않고 자유를 추구하는 광대들을 향한 찬사였다. 연예인에게 무조건 ‘투사’가 될 것을 강요할 순 없겠지만, 모든 운동이 힘을 잃어가는 요즘 가장 큰 ‘힘’을 갖고 있는 연예인들에게 그들의 ‘대중성’을 사회 부정의의 해결에 쓸 것을 요구하는 건 지나치지 않다. 맞서 싸우기가 어렵다면 최소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그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지금의 집단적 침묵은 안타깝기만 하다. 권력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언제든 ‘훅’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점에서 당신들의 ‘밥그릇’ 문제이기도 한 까닭이다. 연예인으로서 자본을 포함한 권력 앞에 마냥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하릴없이 굴종만 하는 건 딱한 일이다. 그들에겐 ‘대중’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지 않은가. 연전 3개월 넘게 진행됐던 미국작가조합(WGA) 파업은 ‘미드’ 시청이 일상화된 우리에게도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작가들의 파업에 ‘동조’를 넘어 ‘적극 동참’한 미국 연예인들을 보는 것이 정말 부러웠다.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취소시킬 정도로 작가들의 파업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단연 연예인들의 참여와 이에 반응한 시민들이 있었던 때문 아니었을까.
연예인들이여, 침묵을 깨고 나서기를! 다시 말하지만 김제동 사태는 더는 김제동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들 ‘밥그릇’의 문제고 당신들이 진정 ‘광대’로서 남을 수 있는가 하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다. 민주주의의 필수요소로서 표현의 자유가 걸린 문제이며, 그래서 우리 모두의 문제다. 폴 뉴먼이라면 어땠을까? 그는 생전 “닉슨이 나를 싫어하는 게 영광스럽다”는 정치적 발언을 ‘쿨하게’ 할 줄 알았다. 노동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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