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배움의 의미 실종
평가 수단으로 전락
‘교육의 의미’ 납득시키는
수능 논의 다시 시작해야 내가 수능시험을 치른 지도 6년이 지났다. 이제는 대학의 중턱에서 취업을 걱정해야 하는 나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의 그 초조함을 잊지 못한다. 여기서 지면 내 인생이 끝날 것 같은 두려움에 밤잠을 설치던 10대의 마지막 시기, 조그만 소음에도 민감하던 나를 두고 숨죽였던 우리 가족의 밤. 내게 수능시험은 끔찍했다. 지금의 수험생들도 별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부에서는 그래도 기본적인 학습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수능은 대학생이 된 나를 방해했을 뿐 별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답이 없는 ‘인문학’을 한 가지로 재단하라 강요하던 언어영역은 다양한 사고를 요하는 고등교육의 장애물이었고, 수학처럼 명확한 원리는 세상엔 없었다. 영어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버려 전공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진입을 막고 있다. 내가 초·중·고 12년 동안 배운 것들은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수능시험이 생긴 지 16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기간만큼이나 등급제다, 원점수제다, 표준점수제다, 평가시험이다 등의 많은 논의가 있었으며 지금도 점수 공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논의에는 내가 그동안 가졌던 혼란이 자리잡을 곳이 없다. 중요한 것은 ‘평가기준’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나는 그 안의 ‘내용’, ‘담을 수 있는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시험이란 것은 교육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이었음에도 수능은 평가기준으로서의 구실이 과대하게 강조된 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교육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지 않고 상위 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만 집착하고 있는 것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이런 ‘교육목표 이탈’의 결과는 분명하다. 학생들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억지로 시험용 지식을 주입받고 있고, 공교육기관은 입시학원처럼 전락했다. 교육은 실종되고, 평가만이 남아 청소년들의 자유마저 빼앗고 있다. 요즘에는 정부도 이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 제대로 된 고민 없이 시행되는 일제고사가 그것이다. 덕분에 내가 고등학교 2~3학년 때나 하던 야간 자율학습을 지금은 초등학생이 하고 있다고 한다. 체육이나 음악 교과는 잊은 채 밤 10시까지 척추를 휘게 하는 좁은 의자에 갇힌 아이들을 생각하면, 제2, 제3의 수능과 다름없는 뻔한 시험을 강행하려는 이 땅의 정책 결정자들과 교육자들은 철학도 인간적인 연민도 없는 것인지 묻고 싶다. 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평가시험의 대표 격인 수능에 대한 논의를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평가의 의미’보다 ‘교육의 의미’를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개개인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는 지식들을 효율적으로 담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쪽으로 논의가 전환돼야 한다.
이는 좁게는 공교육의 일방적인 교육방식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할 것이고, 넓게는 교육제도의 전반적 틀을 새롭게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진통을 수반할 것이다. 정혜교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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