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진 교사의 글을 읽고
아이들 그냥 놔두는 것
무책임한 방임과는 달라
교사의 우월적 권한 포기가
학생의 ‘해방’ 가져올 것 지난달 28일치 왜냐면에 실린 최승진 교사의 ‘민주시민 키울 교권은 방임? 회유? 체벌?’이라는 글은 체벌이 사라진 이후에 새로운 가치와 제도로 전환하는 데 실패할 경우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최승진님은 공교육의 목표를 ‘단순히 학업성취도 평가나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한 문제라도 더 많이 맞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자질과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일’로 정의합니다. 이 정의는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고, 이 정의에 따를 경우 체벌로 민주 시민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귀결입니다. 우리 학교에서 체벌 금지는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고, 이제는 교육의 결과로서 민주 시민이 중심이 된 민주 사회가 만들어지는 일만 남습니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일단 정의 자체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현재 공교육의 현실적 정의는 ‘단순히 민주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자질과 교양을 갖추도록 하는 일이 아니라, 학업성취도 평가나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한 문제라도 더 많이 맞도록 하는 것’이라고 봐야 됩니다. 보편적 인권에 기초한 정의와 현실적 정의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이제 현실에서 체벌이 돌아오는 것은 사실상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최승진님의 글에도 나오지만, 학교에서 체벌은 상당히 사라졌지만, 교육에 대한 정의가 바뀐 현실에서 체벌은 사교육과 가정에서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 학원에서는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치겠습니다’ 하는 광고를 하는 학원에서 오히려 학생 모집이 잘되는 게 현실이라고 합니다. 시험 성적 향상이라는 목적 아래 학원과 가정에서 체벌에 길들여진 아이들에게 학교에서만 체벌이 금지되는 현실에서 교사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교육을 할 수 있는 아무런 장치도 없는 선생님들의 답답함에 대해 충분한 공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현실을 현실로서 다 인정하는 사람을 교사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런 사람은 교육 공무원이거나, 지식 전문가 정도일 겁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교사들이 이 역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점일 겁니다. 저는 최승진님의 글 중에 ‘방임’이라는 부분을 조금 더 깊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이들이 교사의 뜻에 따르지 않는 다양한 행동을 할 때 교사가 대하는 자세에 대한 부분인데, 이걸 그냥 놔두는 것은 ‘무책임한’ 방임이 아닙니다. ‘기다림’ ‘자유’ ‘개인에 대한 존중’ ‘자율’ 등 다양한 시각으로 이걸 볼 수 있습니다. 또 아이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동을 충분히 하고 난 뒤에 그 행동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아이가 마주치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대안교육 운동가들은 그동안 꾸준히 폭력적인 체벌과 무책임한 방임 사이에 나 있는 좁은 길인 ‘자유와 자율, 인간 존엄과 기다림의 교육’을 꾸준히 해 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을 하는 데 교권이 정말 필요한가?’ 하는 질문도 꾸준히 해 왔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질문을 통해 저는 ‘교권을 포기해야 교육을 얻을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는 많은 깨달음이 내포되어 있는데, 교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는 교사는 무언가를 알고 있어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사실도 부정합니다. 아이들은 똑똑한 교사에 의해 지적 억압에 갇힌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하는 교육을 ‘지적 억압’이라는 눈으로 볼 필요가 있고, 이 상태에서 ‘해방’을 가져올 교사는 자신이 학생의 우위에서 누렸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교사일 수 있습니다. 최승진님은 교권의 회복이 교육의 중요한 기초라고 생각하시지만, 지금 우리 교육의 현실을 고려할 때 교사는 더 많은 인내와 포기가 요구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게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지만, 이 명제는 정말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 한 번 더 확인합니다. 김재형 보따리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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