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수능을 폐지하고 어느 정도의 내신성적을 전제한 뒤 모두 본고사를 보도록 하자는 게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불정책이 마치 적색정책이고 학교의 자율권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각의 형평성을 유지했으면 한다. 대학의 자유로운 학생 선택권이 중요하다면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 역시 중요하다. 그러면 학생들이 언제 학교 선택권이 없었냐며 학생들은 다들 원하는 대학이 있다고 대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학생들 태반은 스카이(sky)를 원한다. 서로 다른 자질과 능력이 있는 학생들이 모두 한 가지 선택을 원한다는 것, 이거 괴기스럽지 않은가. 이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특정 학벌 패거리들의 독과점 시스템화되었고, 대학이 특성화되어 있지 않은 간판으로서의 존재의미로 전락했다는 반증이다. 덧붙여 대학의 자유로운 선택권은 소위 주류 대학의, ‘그들만의 주장’일 뿐이다. 비서울권 대학은 지금 학생들의 지원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며, 이런 학교들은 학생 선택권이 문제가 아니라 학생 유치가 오히려 시급한 문제다. 그런데도 대학교의 자율권이 대학의 핵심 요구사항인 양 주장하는 것은 스카이 위주로 돌아가는 이 사회의 왜곡된 한 단면이다. 입시전쟁 속에서 우리 학생들은 한 문제라도 더 맞히기 위해 다량의 지식을 머릿속에 쑤셔넣고 있다. 이들에게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글쓰기를 체득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내신에서 일정 수준의 학력을 검증받고 논술시험을 모든 학생들이 치르게 하는 것도 나름의 대안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주관식 시험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십대 때 얻는 대학 간판이 개인의 권력의 질과 행복의 크기를 결정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근절하고 특정 학벌 패거리의 독과점을 깨뜨리기 위해 학력란 폐지, 공직자 학교할당제 등 구체적인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때라야 너무나 치열하기에 잡음 없는 객관식 시험을 고집하게 되는 한국 입시제도에 주관식 시험방식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독일은 대학 진학 희망자들에게 서너 과목을 선택하게 하여 주관식 시험을 치르는 아비투어가 있고, 프랑스는 정답 없는 문제를 주고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글쓰기를 측정하는 바칼로레아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섯 가지 답안 중에 하나를 찍는 수능이 있다. 이박동건/학벌 없는 사회 푸른모임
왜냐면 |
논술 강화엔 전제가 필요하다 |
반론-“그래도 논술은 …”을 읽고
주관식 시험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십대 때 얻는 대학 간판이 개인의 권력의 질과 행복의 크기를 결정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근절하고 특정 학벌 패거리의 독과점을 깨뜨리기 위해 학력란 폐지, 공직자 학교할당제 등 구체적인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이재식씨는 ‘그래도 논술은 강화돼야’라는 제목의 기고글에서 대학생들에게 비판적 사고가 부족하고 논리적 글쓰기도 미숙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대학 수학능력이란 논리적 토론과 합리적 글쓰기에 있다는 지적은 나 역시 동감한다.
문제와 답을 이미 설정하고 주어진 답안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은 지극히 뒤떨어진 평가방법이다. 각 전문영역에서의 성과는 문제의 설정 자체를 새로이 하고 당대의 객관화된 패러다임을 도발적으로 뒤틀어 얼마나 설득력 있는 결과물을 창출하느냐에 있다. 하지만 지금의 객관식 평가제도는 애초에 학생들의 사고를 수동적으로 만들고 학생들이 다량의 지식을 암기하여 정답을 선택하게 할 뿐이다. 이는 과정의 논리성을 검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문학의 경우 정답이라는 것 자체가 인문학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을 묵과한다.
예컨대, 도덕 교과의 경우 도덕적 선은 논박이 필요한 답 없는 주제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주제들을 가지고 논쟁하면서 학생들은 비판적 사고력과 논리의 훈련을 키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는 단지 학파의 이름, 학파의 내용을 얼마나 외웠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에 맞춰 지식을 강제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학생들은 한 문제라도 더 맞히기 위해 전심전력 암기에 경주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객관식 평가제도가 아니라 말하기와 글쓰기야말로 대학 수학능력 시험의 척도라는 이씨가 서울대의 본고사 부활을 옹호하고 대학의 자율권을 주장할 때는 조금 안타까워진다. 이씨는 특목고, 자립고의 우수한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서울대의 본고사 부활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왜 특목고 학생들이 논술에서 우수할 것이라고 확신하는지 모르겠다.
특목고 학생들이 특목고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말하기와 글쓰기의 평가를 받았는가? 단지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일반적 시험을 통과했고 따라서 그들 역시 현 입시제도의 종속변수에 그친다. 특목고 학생들이 논술에 강할 것이고 그들을 대학들이 선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은 근거 없는 관습적 오류일 뿐이다.
또한 논술시험이 등장할 때 형성될 또다른 사교육 시장과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추가 부담은 어떻게 할 것이며, 고등학생들이 학교라는 공적 장치와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을 통해 하루 약 14시간을 넘게 정신노동에 강제되고 있다는 점은 왜 간과하는지 모르겠다. 성장기의 학생들에게 이런 과중한 노동이 부여되고 있다는 건 사실 집단 소송감이다. 이런 상황에서 논술이 좋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봐야 수험 노역에 짐을 하나 더 얹자는 주장이 될 뿐이다.
진실로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수능을 폐지하고 어느 정도의 내신성적을 전제한 뒤 모두 본고사를 보도록 하자는 게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불정책이 마치 적색정책이고 학교의 자율권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각의 형평성을 유지했으면 한다. 대학의 자유로운 학생 선택권이 중요하다면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 역시 중요하다. 그러면 학생들이 언제 학교 선택권이 없었냐며 학생들은 다들 원하는 대학이 있다고 대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학생들 태반은 스카이(sky)를 원한다. 서로 다른 자질과 능력이 있는 학생들이 모두 한 가지 선택을 원한다는 것, 이거 괴기스럽지 않은가. 이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특정 학벌 패거리들의 독과점 시스템화되었고, 대학이 특성화되어 있지 않은 간판으로서의 존재의미로 전락했다는 반증이다. 덧붙여 대학의 자유로운 선택권은 소위 주류 대학의, ‘그들만의 주장’일 뿐이다. 비서울권 대학은 지금 학생들의 지원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며, 이런 학교들은 학생 선택권이 문제가 아니라 학생 유치가 오히려 시급한 문제다. 그런데도 대학교의 자율권이 대학의 핵심 요구사항인 양 주장하는 것은 스카이 위주로 돌아가는 이 사회의 왜곡된 한 단면이다. 입시전쟁 속에서 우리 학생들은 한 문제라도 더 맞히기 위해 다량의 지식을 머릿속에 쑤셔넣고 있다. 이들에게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글쓰기를 체득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내신에서 일정 수준의 학력을 검증받고 논술시험을 모든 학생들이 치르게 하는 것도 나름의 대안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주관식 시험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십대 때 얻는 대학 간판이 개인의 권력의 질과 행복의 크기를 결정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근절하고 특정 학벌 패거리의 독과점을 깨뜨리기 위해 학력란 폐지, 공직자 학교할당제 등 구체적인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때라야 너무나 치열하기에 잡음 없는 객관식 시험을 고집하게 되는 한국 입시제도에 주관식 시험방식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독일은 대학 진학 희망자들에게 서너 과목을 선택하게 하여 주관식 시험을 치르는 아비투어가 있고, 프랑스는 정답 없는 문제를 주고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글쓰기를 측정하는 바칼로레아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섯 가지 답안 중에 하나를 찍는 수능이 있다. 이박동건/학벌 없는 사회 푸른모임
진실로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수능을 폐지하고 어느 정도의 내신성적을 전제한 뒤 모두 본고사를 보도록 하자는 게 더욱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불정책이 마치 적색정책이고 학교의 자율권을 옹호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생각의 형평성을 유지했으면 한다. 대학의 자유로운 학생 선택권이 중요하다면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 역시 중요하다. 그러면 학생들이 언제 학교 선택권이 없었냐며 학생들은 다들 원하는 대학이 있다고 대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학생들 태반은 스카이(sky)를 원한다. 서로 다른 자질과 능력이 있는 학생들이 모두 한 가지 선택을 원한다는 것, 이거 괴기스럽지 않은가. 이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특정 학벌 패거리들의 독과점 시스템화되었고, 대학이 특성화되어 있지 않은 간판으로서의 존재의미로 전락했다는 반증이다. 덧붙여 대학의 자유로운 선택권은 소위 주류 대학의, ‘그들만의 주장’일 뿐이다. 비서울권 대학은 지금 학생들의 지원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며, 이런 학교들은 학생 선택권이 문제가 아니라 학생 유치가 오히려 시급한 문제다. 그런데도 대학교의 자율권이 대학의 핵심 요구사항인 양 주장하는 것은 스카이 위주로 돌아가는 이 사회의 왜곡된 한 단면이다. 입시전쟁 속에서 우리 학생들은 한 문제라도 더 맞히기 위해 다량의 지식을 머릿속에 쑤셔넣고 있다. 이들에게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글쓰기를 체득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내신에서 일정 수준의 학력을 검증받고 논술시험을 모든 학생들이 치르게 하는 것도 나름의 대안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주관식 시험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십대 때 얻는 대학 간판이 개인의 권력의 질과 행복의 크기를 결정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근절하고 특정 학벌 패거리의 독과점을 깨뜨리기 위해 학력란 폐지, 공직자 학교할당제 등 구체적인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때라야 너무나 치열하기에 잡음 없는 객관식 시험을 고집하게 되는 한국 입시제도에 주관식 시험방식이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독일은 대학 진학 희망자들에게 서너 과목을 선택하게 하여 주관식 시험을 치르는 아비투어가 있고, 프랑스는 정답 없는 문제를 주고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와 논리적 글쓰기를 측정하는 바칼로레아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섯 가지 답안 중에 하나를 찍는 수능이 있다. 이박동건/학벌 없는 사회 푸른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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