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 민간인 학살은 국가범죄
공소시효 소멸은 납득못할 논리
포괄적 보상특별법 마련해야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국가가 자국민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이 있을까. 눈을 씻고 봐도 지구상엔 그런 전쟁은 없다. 차라리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재앙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서글프게도 60여년 전에 일어난 한국전쟁이 바로 그 전쟁이다. 동족상잔의 슬픈 전쟁인 점은 접어두고라도 정부가 자국민 보호는커녕 자국민 살상이 지상과제인 양 무작하게 살상한 민간인 피학살자 수는 자그마치 1백만명이 넘는다. 그 시기 인민군과 중공군에 맞서다 전사한 희생자는 18만명이다. 얼마나 이상한 전쟁인가. 수치상으로만 보면 남한에서의 한국전쟁의 목적이 민간인 학살에 있었다고 봐도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한 달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가 있던 날이다. 당일 오전에 서울 고법에서는 울산국민보도연맹사건의 항소심 재판이 열려 원고인 유족이 패소했다. 울산국민보도연맹사건은 이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진실규명을 결정한, 한국전 직후 정부가 저지른 대규모 양민학살사건 중 하나이다. 관련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해 지난 2월, 1심에서 승소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8월, 재심에서 재판부는 ‘국가의 잘못은 인정하지만 공소시효 소멸로 인해 국가는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시했다. 올해 들어 유족들이 제기한 나주부대 집단학살사건, 문경 학살사건 등도 역시 공소시효 소멸로 줄줄이 패소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은 국가 공권력이 자행한 살천스런 집단살상이다. 유족들로서는 국가가 은폐한 사건의 내막을 알 수 없었으며, 사건 자체를 입에 올리는 것도 불온시되었던 터에 언감생심 그 누가 국가를 향해 대지를 수나 있었겠는가. 사안이 이러할진대 공소시효가 소멸됐다는 이유는 납득할 수 없는 논리이다. 이미 예정된 결과를 만들어 두고 그 결과를 보호할 ‘구럭’이 필요했던 것일까? 차라리 구 정권이 저지른 죄상으로 말미암아 현 정권이 감당할 보상액이 엄청나 부득불 ‘패소’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노라면 그나마 한 가닥 측은지심이라도 생기겠는데 말이다. 진실화해위가 9월 현재까지 처리한 사건은 총 1만1017건 가운데 58%이다. 이미 진실규명이 된 유족들은 앞으로도 계속 법정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기 다른 재판 결과로 정부와 유족은 ‘혼란스러움’의 극치를 경험하게 될 것이 뻔하다. 이 어려움을 헤쳐가기 위해서는 국가가 먼저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큰 결단을 내려야 한다. 즉 국가가 유족을 위한 후속조치로 소멸시효의 배제와 배·보상의 방식을 통일한 포괄적인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외국의 경우 아르헨티나, 남아공, 독일 등이 이 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진실규명이 이루어진 시점부터 정부예산으로 보상재원이 만들어진 경우이다. 세계사적인 흐름도 집단희생에 대한 배·보상을 폭넓게 수용하는 추세이고 보면 이 특별법이야말로 국가가 취할 수 있는 늘품 있는 대책이 되리라 본다.
최명진 한국전쟁 전국유족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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