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거기인 자본과 언론의 공모
‘버거 퀸’ 하나 더 세우면
패스트푸드 다양해지는 것인가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은 “미디어법은 지상파 독점의 방송 구조를 깨고 방송 다양성을 보장할 것”이라 주장했다. 기업이 방송 시장에 진출해 종합편성채널을 몇 개 더 늘리면 언론소비자들의 선택권도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논리다. 형식 논리만 보면 나 의원의 주장은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다양성에 대한 그의 철학과 내용이다. 초저녁 가요 프로그램에 8등신 미녀 댄스 그룹이 몇 팀 더 추가된다고 한국 가요계의 다양성이 확대되는 것은 아니다. 힙합, 하드록, 펑크, 포스트모던 재즈 등 색깔이 다른 여러 갈래(장르)가 함께 어우러진다면 모를까. 단순 개체 수가 늘어나는 것을 두고 우리는 다양성이 확대됐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거기서 거기’인 아이돌 그룹만 잔뜩 늘어나는 것은 가요계의 획일성을 더욱 키우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하워드 진은 “미국 국민에게는 ‘언론의 자유’가 있지만, <엔비시> <시비에스> <에이비시> 중에서만 골라 볼 수 있다”고 했다. 다양한 채널이 있어서 선택권이 많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큰돈을 거머쥐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는 ‘거기서 거기’인 방송만을 선택할 뿐이라는 것이다. 간혹 도전적이고 의견을 달리하는 언론인도 있지만 대부분 기업의 광고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안 되는 독자를 만나기 위해서도 피땀 어린 노력을 해야만 한다. 미국의 거대 방송사들의 논조가 ‘거기서 거기’인 이유를 노엄 촘스키는 자본과 언론의 공모 관계 때문이라고 했다. 대중들이 보기에 하나만 있어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한 거대 방송사들이 비효율적으로 늘어난 것도 자본과 언론의 유착 때문일 것이다. 한국이라고 사정이 달라질까? 아니다. 따라서 진정한 방송 다양성을 말하고자 한다면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 지형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송사가 늘어나는 것을 의미해야 할 것이다. 소외된 노동의 관점에서 자본의 논리까지 비판할 수 있고, 수도권 중심의 언론 지형에서 지역의 목소리도 큰 울림으로 전달하게끔 하는 것이 방송 다양성이다. 군소 언론, 풀뿌리 언론도 <문화방송>이나 <한국방송>, <에스비에스>와 같은 층위에서 방송하여 여론 시장에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것이 방송 다양성이어야 한다. 나 의원의 논리대로라면 진정한 방송 다양성은 요원한 일이다. 언론 획일화의 주범인 ‘자언유착’을 더욱 열어주고 신문발전위원회를 폐지해 군소 언론, 풀뿌리 지역 언론의 자립도 발목을 잡았다. 그러면서 그것이 “방송 다양성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차라리 미국산 쇠고기만 사용한 ‘버거 퀸’을 하나 더 설립하고 패스트푸드 시장의 다양성을 이야기해 보는 것은 어떨까? 김도년 서울 마포구 상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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