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안흥정 앞바다에서
물이 무더기로 출토되고 있어
유물 보전·연구 정책 지원 시급 고려는 개방된 국제적 외교정책을 활발히 진행한 왕조이다. 국제간 민간무역이 활성화되고 외교적 역학관계에 따라 사신외교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수도 개경의 관문인 예성강 어귀 벽란도는 사철 내내 국제적 상인들로 항상 붐볐다. 회회아비(아라비아 상인), 몽골인, 각국의 사신, 송원 상인, 서역 상인 등 고려의 수도는 그야말로 국제적이고 개방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개경과 더불어 국제적 사신들과 상인들이 꼭 안식하고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태안 마도 안흥정이었다. 고려시대에 국제적인 상거래가 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송나라 때 발명된 나침반과 항해술의 발전에 기인한 바 크다. 송나라 이후는 자본주의의 태동기라고 할 만큼 물산이 풍부해지고 자본이 축적되는 시기이다. 남송의 강남지역은 쌀, 면화, 도자기, 비단 등 다양한 교역품이 등장하면서 축적된 자본을 배경으로 국제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크게 늘어났다. 또 석탄의 보급 확대로 제철·제염 등 제조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국제무역을 위하여 중국 강남지역의 상인들은 항저우, 밍저우 등 국제 무역항을 출발하여 우리나라의 흑산도, 고군산도, 태안 안흥정을 거쳐 개경의 벽란도에 입항하였던 것이다. 최근 태안 마도 앞바다에서는 고려청자뿐만 아니라 송, 원, 명 시대의 다양한 유물이 나오고 있다. 도자기, 선체, 석탄 등 당시 국제적 무역관계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 대거 출토되고 있다. 이곳 태안 앞바다에서 유물이 대거 출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교역선의 침몰과 관련이 있다. 선박이 좌초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안개, 풍랑, 급조류, 세 가지가 주원인이다. 태안 앞바다는 그야말로 난행량(‘통행이 어려운 여울목’이란 뜻) 지역이었다. 태안 안흥정이라는 객관에서 머물고 기상 조건이 좋아지면 이곳을 통과해야 하는 중간 기착지였던 곳이다. 송나라의 사신 서긍 일행도 이곳 안흥정에서 여정을 가다듬었다는 기록이 ‘선화 봉사 고려도경’이라는 기행문에 잘 나타나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곳 태안 마도 앞바다에 대한 수중 발굴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2007, 2008년 2년 동안 이곳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는 고려청자 보물선을 비롯한 2만3000여점의 수중 유물을 인양하였다. 더불어 태안 마도 앞바다에서는 2008년 고려청자 515점, 2009년에는 선체 등 380여점의 유물을 건져 올렸다. 그야말로 수중의 박물관이다. 앞으로 20년간의 학술발굴을 계획할 정도로 무궁무진한 유물의 보고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우리의 속담이 있다. 이 많은 소중한 유물을 체계적으로 보전·연구하고 복원·전시할 수 있는 시설과 정책적 지원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김한국 태안해양문화재연구소 추진 홍보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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