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교사 뜻 모일 리 없고
그렇게 보려는 시각이야말로
교사들의 자발성 모욕
교사들의 충언마저 옥죄지 마라 학교는 개혁의 무덤인가? 그 어떤 개혁적인 제도도 강을 건너 학교에 오면 탱자로 변한다. 누구 탓일까? 1995년 5·31 교육개혁안은 교사를 개혁의 걸림돌로 지목했다. 하지만 남은 것은 학교 붕괴 담론이요, 잃은 건 교사들의 자발성이었다. 그 후 내내, 학교는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으로 굳어져 왔다. 수많은 처방이 동원되었지만 학교는 국민들이 기대하는 변화의 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정부 들어서 추진한 ‘학교자율화’ 정책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정부는 자율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 권한을 누려야 할 당사자인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은 손사래를 치고 있다. 1단계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정책을 수정하지 않고 2단계, 3단계 밀어붙이다 보니 교사들은 질식할 지경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학교라는 구조 속에서 자율을 통해 교육 목표를 달성하려면 구성원 간에 소통은 필수다. 교사가 학생에게 자율학습을 강제하는 한 학교자율은 구호에 불과하다. 교장이 교사에게 자율학습 참가율을 높이라고 채근하면 자율은 학교 문밖으로 달아나게 되어 있다. 그런 학교 현실을 뻔히 들여다보면서 말로만 학교자율을 반복하는 정책으로는 이전 교육 개혁의 실패를 만회할 수 없다. 공문은 자율, 또 자율을 강조하며 내려오는데, 교사의 자율성은 반토막 나는 게 현실이라면 사태의 근원을 보면서 해법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시급하다. 불과 사나흘 만에 1만7천여 교사들이 시국선언에 참여한 배경에는 그런 자율 없는 역주행 학교 정책이 자리잡고 있다. 학교 안의 각종 협의기구들이 무시되고 단체협약조차 일방적으로 파기되고, 교사들에게는 학생들을 쥐어짜는 감시자 역할만 강화하라고 하면서 학교가 자율화되고 있다고 하니 교사들의 울화는 깊을 대로 깊어져 왔다. 게다가 같은 국가공무원 신분인 국공립대학 교수는 물론 청소년, 종교인, 예술인, 학생들까지 온 국민이 할 수 있는 말을 교사들만 하지 말라는 교육과학기술부 공문은 교사들의 분노에 불을 댕겼다. 말길에 민감하면서 잘 말하고 잘 듣는 교사가 훌륭한 교사다. 정부가 교사들에게는 학생과 학부모와 잘 소통하라고 하면서 정작 교사들의 목소리를 억누른다면 학교자율화의 길은 더욱 요원해진다. 지금은 교사들이 애써 연 입을 닫는 데 행정력을 동원할 때가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온 말의 의미를 곱씹을 때다. 말길을 터 교사들의 분노를 삭여도 시원치 않을 판에 징계부터 운운한다면 막힌 말길은 분노로 축적될 것이다. 축적된 분노는 관계를 가로막고 학교를 불통의 공간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불통으로 이룰 수 있는 자율은 없다. 차라리 정부가 ‘40만 교사 중에 1만7천은 적은 숫자’라는 청와대의 논리에라도 위안을 얻어 상황을 과도하게 해석하지 않기를 바라야 할까? 교사들은 충정을 담아 쓴소리를 했는데 이를 또다른 갈등의 쏘시개로 악용한다면 학교의 변화를 추동할 힘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누가 주동한다고 삽시간에 그 많은 교사들의 뜻이 모일 리도 없고 그렇게 보려는 시각이야말로 교사들의 자발성을 모욕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과부는 시국선언이 법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초기 검토 의견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번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면서 교사들의 진심을 읽어내야 한다. 거기서 학교자율화를 이룰 동력은 어디서 나올 수 있는지, 교사들의 자발성을 살리는 방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숙고하기 바란다.
능숙한 씨름 선수는 상대가 힘을 쓸 때 그 힘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한다. 혀를 자른다고 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바에야 교사들의 충언을 꽉 막힌 학교자율화의 물꼬를 트는 쪽으로 돌릴 수는 없는지. 교사들을 옥죄면 교육의 숨통도 막혀왔던 지난 경험이 안타까워 ‘당나귀 귀’라고 소리치던 그 심정으로 하는 말이다. 임병구 전교조 인천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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