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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5.24 19:47 수정 : 2009.05.24 19:47

왜냐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대한민국 검찰의 거만. 생계형 범죄라며 그를 비웃는 야비한 언론의 공세. 이상주의를 구현하려던 좋은 정치인 하나를 죽였다

1990년대 어느 봄날로 기억된다. 경기도의 한적한 중소도시에 살던 시절, 그곳 야당 지구당에서 개최하는 주민 참여의 행사로 ‘노무현 국회의원’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집사람까지 동행하여 참석했던 그 강연회에서 노무현 의원은 주된 청중인 장년, 노인들에게 풀뿌리 민주주의의 의미를 강조했다. 말미에 엉뚱하게 지역 민원에 대해 질문하는 한 할머니에게 공허한 원론적 대답을 할 뿐이던 노무현 의원은 콩코드 승용차를 타고 먼지를 내며 사라졌다. 아마도 지구당에서 동원했을, 나이 든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에게 노무현의 이상주의는 당시 별로 어필하지 못했을 것이다. 질문을 던졌던 할머니는 노무현 의원의 맥없는 대답에 혀를 찼으니까.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 다음날, 일산 김대중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김대중’을 연호하며, 드디어 다가온 민주주의의 새벽을 기뻐하던 진보적 대중에게 그 뒤 10년은 만족이기도 했고 또 불만족이기도 했다. 과거 독재, 부패, 부정, 권력, 유착, 위선의 뿌리는 뽑히지 못했고 역사 진전의 그늘에서 진보를 음해하는 구세력과 그 추종자들의 말과 몸짓은 여전했다. 모호한 포용으로 일관한 김대중 정권의 미진한 사회개혁은 2003년 수많은 젊은이들의 열광 속에 등장한 노무현 정권에서도 ‘말이 앞서는 이상주의’를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실패를 거듭했다. 현실을 모르는 대학교수들 전용의 수많은 정부 위원회와 모양만 그럴듯한 로드맵, 전국의 투기를 부추긴 지방균형발전론과 도처의 혁신도시가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취임 바로 뒤 개최되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검사들과의 대화는 정권의 미래를 어느 정도 예고한 행사였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검사들은 새 대통령에게 무례할 정도의 아집과 도전의 자세를 보여줬고 대통령의 설득과 대화 의지는 압도와 감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아마 그때의 대한민국 검찰이 가졌던 일그러진 거만과 기만이 2009년 5월 오늘 전 대통령의 자살을 불러오는 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진의를 세세히 그때그때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기던 성격의 정치인 노무현은 재임 동안 줄곧 말꼬리를 잡혔고,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국민 개개인과 같은 눈높이를 가지려고 했던 그의 자세는 대통령의 힘과 무게에 익숙한 이들에게 오히려 실망과 싫증을 불러왔다.

정치인 노무현은 갔다. 어두운 짓에 익숙하고 그럴듯하게 현실을 왜곡하는 ‘과거의 세력’들에게 흠을 잡혀 정신적 고문을 당하다가 스스로 어려운 상황을 청산한 것이다. 그의 형제나 부인이 범한 실수가 이상주의의 기준으로 볼 때 감당하기 힘들었겠고, 또 생계형 범죄 운운하며 그를 비웃던 보수언론의 야비한 공세에 휩쓸려 크나큰 경멸감을 쉽게 공유한 사회 전반의 대중에게 할 말이 없었음에 틀림없다.

충무공을 죽이고, 전봉준을 죽이고, 백범 선생을 죽이고, 오늘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변하지 않는 인적 자원 악순환의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우리 사회는 2009년 다시 이상주의를 구현하려고 애썼던 좋은 정치인 한 사람을 죽였다. 수천억원을 챙기고 나눠먹고 총칼을 휘두르던 자들은 여전히 오래오래 잘살고 있고, 아세곡필의 언론 추종자들도 교묘한 펜을 한껏 움켜쥐고 있다. 스스로의 과오를 용납하지 못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이상주의자의 귀결인지도 모르지만, 지난 한두 달 우리 사회가 보여준 몰아붙임과 간단한 실망의 관습이 지나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날이 오면>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기를 기다렸던 모든 이들은 이제 슬픔 속에서 좋은 정치인 한 사람을 떠나보낸다. 일반 대중과 생각의 높이를 함께하려고 애썼던 전임 대통령, 고이 잠드시라. 맑은 한국사회의 이상을 꿈꾸며…. 훗날 누군가가 올바른 그 길의 문을 다시 열 것이다.

김윤 서울 마포구 용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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