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국제정치 속성상 제재는 효과 별로‘말’이 분쟁이 되고 전쟁까지 비화
‘말의 격화’ 촉진하는 제재보다는
북의 의도 꿰뚫어보는 게 더 중요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를 두고 유엔이 의장성명을 발표하고, 여기에 북한은 6자회담을 던져버리고, 우리 정부는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PSI)에 전면 참여하기로 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문제는 악화된 한반도의 안보지수로 우리가 직접 피해를 보게 되고, 북한은 점점 국제사회의 공적으로 몰리고, 일본과 같은 주변국은 동북아의 긴장 분위기를 국내 정치는 물론 군비 강화에 이용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3단계 로켓 발사 국면에서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언론과 시민들은 강경 대응을 주문했다. 국민 ‘상당수’가 북한에 대한 제재를 원한다는, 근거 불분명한 주장을 펼치면서 일찌감치 유엔과 국제사회의 제재를 앞장서서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해볼 일이다. 국제정치에서 제재(sanction)란 어떤 성과를 내는 데 그다지 유효한 수단이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특정 국가에 대한 제재는 성공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1806년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을 압박했지만 결과는 동맹국의 분열과 프랑스의 패배였다. 영국에 대한 무역을 금지하자 유럽의 각국은 영국의 값싼 공산품을 사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결국은 스웨덴, 포르투갈, 러시아 순으로 나폴레옹 대열에서 이탈했다. 나폴레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를 공격했고, 이 전쟁에서 참패함으로써 몰락했다. 쿠바나 이라크에 대한 장기적인 경제제재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사실 국제정치의 속성이 그렇다. 국제사회는 일사불란할 수 없고 국가의 이익에 따라 수시로 적과 아군이 변한다. 힘을 쥐고 각 나라를 통제하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게 국제사회의 기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그동안의 제재도 사실은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타격이나 압박을 가했다기보다는 북한의 행동에 대한 규탄을 상징하는 성격이었다. 성명을 내고 북한을 비난하는 의미 이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외교는 ‘말’(rhetoric)이다. 그 말이 인식(perception)이 되고, 그것이 분쟁이 되고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1차대전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지지 선언’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지나치게 광의로 해석한 뒤 이를 믿고 세르비아를 전면 공격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북한에 대한 제재를 한다고 국제사회가 나서고, 우리 정부는 피에스아이에 전면 가입하고 하는 사이 남북, 북-미 사이의 ‘말’은 격화되기 십상이다. 물론 우리 정부나 국제사회의 만류에도 로켓을 발사한 북한도 충분히 비난을 받을 만하다. 하지만 북핵문제가 교착 상태에 있는 이 시점에서 ‘말의 격화’를 촉진하는 제재를 더 강조하고, 대북 금수물자 확대 방안을 찾는 것보다는 북한의 행위가 갖는 의미와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면밀히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진정 도발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협상을 하자는 것인지, 이 판단을 먼저 하면 그에 따라 대응 방안은 달라질 것이다. 발사의 시기, 추진체의 낙하 지점까지 국제기구에 통보한 경우를 두고 순수 도발용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6자회담 불참을 선언하면서도 미국이나 남한과 전면 대화 중단을 말하지 않은 측면도 보아야 한다. 2006년 10월 핵실험으로 북-미 간 대화의 장을 마련했듯이 지금의 북한도 어정쩡한 상태에 있는 오바마 행정부를 향해 조속한 직접 대화를 충격적인 방법으로 촉구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정부 입장에서도 중요한 것은 피에스아이 전면 참여나 대북 제재 구체화보다는 우선 북-미 대화의 모멘텀을 모색하고, 활성화되는 북-미 대화 속에서 우리의 입지를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일이 아닐까.
안문석 한서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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