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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22 18:25 수정 : 2009.03.22 21:37

왜냐면

반론 / ‘자명고란 없었다’를 읽고

‘자명’은 본디 부처님 설법에서 나온 말
팔만대장경에 213번이나 거론
‘자명고’ 어휘 없다고 부정해선 안돼

<한겨레> 3월16일치 21면 ‘왜냐면’란에 실린 현행복님의 ‘자명고란 없었다’란 글을 공감하며 잘 읽었다. 과학과 이성의 관점에서 좀체 흠잡기 어려운 명쾌한 논리와 설득력은 독자의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한다. 더구나 음악사를 함께 연구하는 성악가이시니, 이론과 실기를 아우른 학제 간의 수준 높은 전문성을 갖추었으리라 믿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순전히 물질현상의 과학원리를 바탕으로 문명사관에서 펼친 사유여서, 과학의 미명으로 대중의 과학만능 미신(어리석음)을 더욱 부풀리고, 그 결과 고대 역사기록을 순전히 신화나 전설 같은 자화자찬식 허구로 치부하도록 잘못 이끌까봐 저어하여, 감히 이 댓글을 쓴다. 물론 과학원리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던 옛날에, 더러 특정 정치이념이나 목적을 위해 사실과 다르게 부풀리거나 꾸며 일시 사람 눈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진실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고대 역사가들이 춘추필법의 정신을 굽혀 천추를 속이는 역사왜곡을 저지르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고 본다.

합리적 과학이성으로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역사기록을 되짚어 보며 검증하는 일은 진리탐구에 필요하고 바람직한 자세다. 하지만 확증도 없이 기존의 전통이나 문헌기록을 아예 부정하는 속단은 신중한 학문의 태도가 아니다. 현전하는 사료가 당시 문헌의 ‘빙산의 일각’도 안될 텐데, 그토록 유한한 기록에 ‘자명고’란 어휘가 안 보인다고 해서, 자명고란 명칭과 실재가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 수 있다. 더구나 “국어사전에조차 등재되지 않은 것”으로 말하는데, 수많은 국어사전 가운데 어느 판본을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진 두 사전(이희승 감수, 민중서림의 엣센스 국어사전과 이숭녕 등 감수, 삼성문화사의 국어대사전)에는 모두 ‘자명고’란 단어가 어엿이 실려 있다. 이는 명백한 무단(武斷)이요 오류다. 북이 저절로 울리면 그게 바로 ‘자명고’지, 따로 ‘자명고’란 고유명사라도 역사에 꼭 실려 있어야 한단 말인가?

‘자명’은 본디 불경에서 부처님이 설법할 때나 장엄한 법회의식 때, 천상에서 찬탄하여 공경예배하는 뜻으로 선녀나 악신(樂神: 건달바)들이 하늘꽃(天華)도 흩뿌리고 미묘한 음악을 연주하며, 하늘북(天鼓)이 저절로 울린다는 기록에서 유래한다. 고려 팔만대장경에는 ‘하늘북이 저절로 울린다’(天鼓自鳴)는 구절 17번을 비롯해, ‘연주하지 않아도 저절로 울린다’(不鼓自鳴)는 구절까지 합쳐 모두 213번이나 나온다. 또 비슷한 현상을 나타내는 기록으로, 부처님 제자들이 처음 부처님을 찾아와 출가하는 모습을 그리는 장면에서, 부처님이 “잘 왔네, 비구여”라고 말하면, 제자 될 사람의 “수염과 머리카락이 저절로 떨어지고 법복이 몸에 입혀졌다”(鬚髮自落, 法服着身)는 기록이 무려 178번이나 나온다.


한편, ‘자명고’와 제법 비슷한 기록이 역사문헌에 보이기도 한다. 원나라 이세진(伊世珍)이 쓴 랑현기(瑯?記)에는 손봉(孫鳳)이 토수(吐綬)라는 거문고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람이 타면 썩 아름답지 못한데, 유독 사람이 한 곡조 뽑아 부르면 곧 거문고 줄이 저절로 그에 화답하여, 이름을 ‘자명금’(自鳴琴)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물론 요즘 같은 과학시대에 이런 기록을 진실로 믿을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의 역사기록이라는 구약성서나 예수님의 전기인 신약성서에는 또 얼마나 믿기지 않을 신통기적이 나오는가? 예수님이 “이 독사새끼들아, 너희가 기적 보기를 바라느냐?”고 직접 꾸짖었듯이, 말세의 우리 마음에 탐진치 삼독(三毒)과 무명의 때가 잔뜩 끼어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기적도 보지 못하고, 수많은 신통기록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닐까? 과학기술문명의 첨단을 선도하는 서방 선진국에 수많은 지식인 기독교신자가 있는데, 그들이 모두 믿음은 과학과 별개라고 분리하면서, 과연 성경의 신통기록은 과학에 어긋난다며 깡그리 부정하고 무시할까? 지금도 이따금씩 알려지는 불가사의한 일들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근데 유감스럽게도, 더러 우리나라 기독교도 가운데는 구약의 기적이나 예수님의 신통은 성경구절 그대로 믿으면서, 유독 우리나라 단군 건국이나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은 우상숭배의 신화나 전설이라고 부정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자기 모순인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속담이 있다. 신통의 세계에서 비록 나는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지만, 그러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에는 상당한 믿음이 절로 든다. 예전에 청정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도덕을 높이 닦은 성현들은 중생이 생각할 수 없는 신통기적을 인연 따라 나타낼 수 있었고, 낙랑의 ‘자명고’도 그러한 훌륭한 도덕과 성현의 실재를 암시하는 기록의 하나로 믿어진다. 나는 과학과 이성이 완전무결한 궁극의 경지가 아니라고 여긴다. 인류역사는 관점에 따라서는 “인간의 건설은 자연의 파괴요, 이성과 과학문명의 발전은 신성(神性)의 타락이다”라고 볼 수 있다. 신성을 타락해 잃어버린 말세의 인간이성이, 순수했던 고대의 신성이 겪고 적은 기록을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과보(果報)일 것이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자기 알음알이로 이해할 수 없다고 존재 가능성 자체까지 부정하는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이겠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어리석은 만용일 수 있다.

앞으로 과학기술이 한층 더 발전하여, 만약 엑스선(X-ray)을 훨씬 능가하는 와이선(Y-ray)이 나와 4차원도 사진 찍고, 현재의 우주선보다 성능이 훨씬 뛰어나, 시간을 초월해 자유자재하는 타임머신 같은 제트선(Z-ray)이라도 나와서 수천 수만 년 전의 과거를 생생하게 사진 찍는 날이 온다면, 지금의 과학문명은 몹시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미신임이 저절로 판명 날 테고, 우리들의 이러한 사소한 논란이나 공방도 참말 부질없는 어린애들 소꿉장난의 역사로 남을지 모른다. 그때가 올 때까지는 과학이성과 정신영성의 말다툼이 쉽사리 그치지 않겠지만!

김지수 전남대 법대 부교수, 동양법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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