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교수 김상봉은 ‘폴리페서’아닌가?’를 읽고 폴리페서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들의 현실 정치 참여 자체가 아니다어떤 목적으로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고
정치에 참여하는지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김상봉 교수가 진보지식인으로서
정치참여 윤리에 배반한 것이 무엇인가 김상봉 교수의 ‘진보신당’ 비례대표 참여를 비판한 글이 실렸다.(<한겨레> 4월11일치 33면) ‘김상봉 교수도 폴리페서 아닌가, 굳이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나오지 않고도 진보지식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먼저 분명히해 둘 게 있다. 김 교수는 진보지식인으로서 평소 해야 할 일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이번에 ‘진보정치에도’ 나선 것뿐이다. 거창하지만 의미는 없다고 했나? ‘거창’하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나? 그의 투신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홍세화 칼럼’에 절박함이 담겼듯 진보신당은 정당지지율에서 결국 2.94%, 절박함은 0.06% 부족이라는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자본주의와 미국의 혜택을 한껏 누리면서, 왜 반미와 반자본을 외치느냐는 물음에 촘스키는 ‘그럼 더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 말란 말이냐’고 반문했다. ‘촘스키 너마저도!’라고 비난할 사람 누구인가?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홀로 동굴을 벗어나 세상의 밝은 빛을 보는 것으로 철학자의 임무가 끝난다고 보지 않았다. 밝은 빛을 본 철학자는 동료들이 갇혀 있는 동굴로 다시 내려가 그들에게 밝은 세상을 전하고 그들을 이끄는 것이야말로 철학자의 임무로 보았다. 미셸 푸코는 ‘진보 정치’를 “학문적 지식이 다른 실천들에 연접되는 하나의 ‘실천’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당 독재 이래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지식과 논리를 배반하는 자들을 숱하게 봐왔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짓밟고 민초의 한을 역사에 피 뿌린 채 정권을 잡은 군사정권에 몸과 정신을 내맡긴 식자층도 보았다. 우리가 오늘 ‘폴리페서’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들의 현실 정치 참여 자체가 아니다.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고 정치에 참여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선거철만 되면 이 정당 저 정당을 기웃거리고, 개각 때만 되면 권력자를 향해 해바라기가 되어 목을 빼고, 대학총장 선거 때 여기저기 줄 서는 행태 때문에 그들을 ‘폴리페서’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과연 김상봉 교수의 ‘진보신당’ 비례대표 참여를 폴리페서의 행태로 비난할 일인가? 그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얻은 실천적 지식을 통해 부조리한 교육 현실을 개혁하려는 신념으로 당의 부름에 따랐다. 그가 진보지식인으로서 정치참여 윤리에 배반하는 그 어떤 행동을 한 것이 있는가? 척박한 오늘의 정치 현실에서 진보에 힘을 싣고, 나서려 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에 약자를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 자기 역할을 받아들이고, 경력에 불이익이 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앞장서는 지식인을 ‘폴리페서’라고 부른다면, 진보를 향한 우리 앞날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물질로 도배된 보수로 변하는 사회 현실 속에서 진보의 가치의 심지를 지피려는 그의 태도를 폴리페서라고 몰아치기에는 우리 현실은 그리 한가하지 않다.
김재홍/관동대 연구교수·정암학당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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