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지식인의 현실참여에 공감하지만학벌사회 비판과 깊이있는 저서만으로
충분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참여
비례대표 이름 빌려주기는 의미 없다 <한겨레> 3월31일치 ‘홍세화 칼럼’의 ‘철학자 김상봉이 가는 길’을 읽고 김상봉 교수의 진보신당 비례대표 참여가 폴리페서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을 문제제기 하려 한다. 홍세화 기획위원의 김상봉 교수에 대한 애정, 그리고 김상봉 교수의 그간 저서와 현실참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인정한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훌륭한 주체적인 지식인이자 철학자가 있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다. 특히 김상봉 교수의 학벌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 자신의 철학적 입론인 ‘서로주체성’이란 개념에 입각해 있기에 인상적이다. 독단적인 서양철학의 ‘홀로주체성’이 아니라 ‘서로주체성’을 인정한 형이상학적 바탕 위에서 한국 사회의 ‘학벌’에 대한 그의 꾸준한 참여는 많은 이에게 귀감을 주었다고 여긴다. 형이상학을 바탕에 둔 견실한 참여, 바로 그렇기에 김상봉 교수의 ‘진보신당’ 참여는 실망을 안겨준다. 과연 ‘참여’가 ‘당’에 들어가 대표가 되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인가? 지식인의 ‘참여’가 ‘당’활동인가? 참여는 대표로 구성된 결사체인 ‘당’활동을 하는 것 외에는 없는가? 데리다나 푸코가 공산당 ‘대표’를 통해 정치활동을 했는가? 물론 홍세화 기획위원의 문제제기인 지식인의 현실참여에 공감한다. 고고한 체하지만,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프로젝트나 따내고 직위나 유지할까 하며 고작 미디어 인터뷰나 해주거나 서명운동에 이름이나 올리고 ‘참여’했다고 자족하는 교수들이 부지기수니까. 또 김상봉 교수는 나와 비슷한 종류의 ‘비난’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히 검토하고 용기를 내셨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정치’를 ‘당’활동이나 ‘투표’행위와 같은 것으로 환원해서 좁히는 것은 오류라고 본다. 김상봉 교수가 활동하는 ‘학벌사회’ 활동도 그 자체가 충분히 정치적이며 그것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활동일 것이다. 또한 그가 연구하고 내놓는 저작들, 특히 도덕교육에 대한 그의 저서를 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현장에 선 ‘교사’들의 감수성이 변화되는 그 자체도 충분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참여’다. 동시에 그가 속한 ‘지방대’에서 벌이는 조용한 그의 ‘인문학적’ 심포지엄, 그것도 아주 충분한 정치적 활동이다. 그렇게 풍부한 활동을 제쳐두고 왜 그는 가능성도 없는 비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려 두었을까? 루쉰이야 “청년이여 나를 밟고”가라고 했다지만, 김상봉 교수의 ‘이름 빌려주기’는 거창하기만 할 뿐, 의미가 없다. 오히려 김상봉 교수는 다른 여타 폴리페서들의 행태들에 대해 실천으로 비판할 수는 없었을까? 예를 들면 교수직을 자진해서 반납하고 활동을 하거나 해서 말이다. 휴직하지도 않고 양다리 걸치는 폴리페서들의 행태는 신문의 사회면 ‘휴지통’에서나 보고 웃고 넘어가겠지만, 평소 훌륭한 지식인이라고 여겼던 김상봉 교수의 참여 형태는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은 듯해 씁쓸하기만 하다. 또한 평소 ‘학벌’과 ‘집단’에 대한 비판을 같이 했던 홍세화 기획위원이 친분을 이유로 칼럼에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모양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내용적으로 200% 이상 진보신당의 정책들을 지지하는 나로서는 ‘우리 편’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당황스럽다. 김상봉 교수는 연구를 통해, 강의를 통해, 지방대의 조그마한 인문학 심포지엄을 통해 대표의 정치가 아닌 ‘진보’의 진정한 새로운 정치를 할 의향은 없으신가?
조재호/광주 광산구 운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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