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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10 18:59 수정 : 2008.04.10 18:59

왜냐면

진보정치에서 대중비판은 금기지만
펀드가 작년 ‘올해의 인물’로 뽑히거나
‘뉴타운 공약’에 넘어가는 표심에 비친
한국인의 초상은 물질적 욕망의 화신
니체가 비판한 대중혐오 떠올리게 한다

1980년대 이후 진보적인 정치운동에서 대중 비판은 금기시하던 주제들 중의 하나였다. 하물며 대중을 혐오하는 관점은 대체로 엘리트주의적 보수정치 논객이 사석에서나 내뱉을 수 있는 극히 모험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대중에 대한 ‘성역화’는 서구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선거제도를 통해 주기적으로 보존되어 왔다. 아마도 ‘민심은 천심’이라는 오래된 동양적 인본주의 전통에서도 대중은 거의 ‘신인동형’(神人同形)으로 격상돼 있다.

하지만 대중에 대한 혐오 내지 비판의 역사 또한 오래되었다. 서구에서 그 효시는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독살사건이다. 민주제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고대 그리스 정치세력은 정황상 소크라테스에게 법적인 구속을 가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죽음은 인간의 ‘심사숙고’(로고스) 능력이라는 탁월성을 실천하지 않는 대중에 대한 경고 메시지였다. 이 사건은 결국 엘리트주의적인 플라톤 철학의 등장을 낳았고, 이후 민주적 대중정치와 은밀한 긴장관계를 형성해 왔다. 아마도 칼 포퍼가 ‘열린사회의 적’인 우파 파시즘의 사상적 기반으로 플라톤주의를 지목한 것도 이러한 전통을 밝히는 많은 예들 중의 하나다.

서구 근대에 이르러 대중을 혐오하고 비판하게끔 했던 시대적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쇄술의 발달로 비롯된 출판도서의 대중화였고, 다른 하나는 문자해독 능력을 가진 독서층의 등장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주체로서 ‘공중’의 출현은 이 기반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진보적 흐름’을 ‘삐딱하게’ 바라본 대표적인 동시대인이 바로 철학자 니체였다. 그에게 대중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얄팍한 지식을 장식품처럼 치장하고 돌아 다니는 ‘교양속물’일 뿐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대중비판론의 흐름이 적잖게 포착된다. 먼저 자본주의적 이윤창출 방식이 광고나 이미지 등을 통해 ‘대중욕망’을 조작하는 데 있다는 지적은, 대중이 구조적 허위의식의 담지자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오래된 관점이다. 21세기에 접어든 우리 한국인의 초상도 이렇듯 ‘물질적 욕망의 화신’으로 묘사할 만하다. 어느 시사 잡지가 2007년 펀드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것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 대중의 욕망은 다양한 방면에서 사회적 행동으로 표출된다. 이를테면 공교육 내실화를 목표로 하는 평준화 교육정책은, 당장 자녀의 입시에 얽매인 학부모에게 진지한 교육 정책적 사안이 되기 어렵다. 자녀를 특수목적고나 명문대에 입학시킨 학부모에겐 평준화는 오히려 그들이 성취한 ‘희소 교육자본’을 위협하는 문제투성이 정책으로 비친다. 이 정책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자녀교육에 ‘실패한’ 학부모다. 이 또한 대중 욕망이 드리운 슬픈 그림자다.

이번 총선에서 수도권 대중의 행동을 읽을 수 있는 코드 또한 욕망이다. 지방보다 부동산 개발로 재산증식의 기회를 가진 수도권 주민에게 ‘뉴타운 개발 공약’은 표심을 움직였던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인다. 개발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국회의원 입후보자는 ‘당신의 재산권을 보장’하겠다고 대중적 욕망을 선거유세에 최대한 발휘했다. 정치적 행위를 비롯한 규범적인 성찰은 자기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잠시 후퇴시켜야만 성립되는 ‘제2차 질서’의 차원에 속한다. 바야흐로 대중적 욕망이 윤리성과 성찰성에 냉소를 보이고 있다.


조상식/동국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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