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지율 스님이 천성산을 지키기 위해 세상으로 나오면서부터 벌어진 이 모든 일들은 이땅의 절망과 희망의 지점을 정확하게 비춰주었다. 그가 비추어 낸 이땅 절망의 지점이란, 통치자와 경제 유령의 실체다. 우리는 경제 유령의 십자군이 되어 날마다 진군해 간다. 경제 유령은 이 세계를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삭막한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침략 전쟁의 하수인 노릇도 마다지 않으며, 참수의 목전에서 “살려달라”는 동족의 처참한 절규도 외면한다. 개펄을 메워 수억조의 생령을 생매장하고, 산천을 뒤집고 거기에 깃든 생명체를 내쫓아 생긴 돈을 나누어 갖는다. 3년 전, 그가 천성산 수행도량을 떠나 홀로 저잣거리에 섰을 때 세상사람들은 지율 스님의 모든 노력을 다만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그것은 이 싸움의 상대가 결코 중단을 모르는 막강한 관성을 가진 ‘국책사업’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로 이 싸움은 이땅의 실질적인 통치자와의 전면적인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천성산 계곡에서 뛰어노는 그 조그마한 도롱뇽을 앞장세웠다. 사람들은 코웃음쳤다. 사람 손가락 하나 크기의, 돈도 안 되는 도롱뇽 한 마리가 어찌 이 수조원짜리 인간의 ‘역사’를 멈출 수 있냐고. 그러나 스님은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고행으로 호소했다. 그리고 눈곱만치의 폭력과 타협과 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인간정신의 위대함과 그것이 품은 사랑의 크기 앞에 대통령이 약속했고, 사업이 잠시 멈추기도 했고, 무엇보다 40만이 넘는 시민들이 거대한 물결로 공명했다. 아직껏 없었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꿈틀거리기도 했다. 이것이 지율 스님의 실천이 비추어낸 이땅 희망의 지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권력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때로는 무시와 냉소로, 때로는 약속과 거듭된 파기로 이 물결을 거슬렀고,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경제’라는 유일신의 강력한 엄호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경제 유령의 철권통치가 심어준 습관적인 의식-무기력감에 서서히 젖어갔다. %%990003%% 그는 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가. 78일째의, 아직도 진행 중인 총 219일의 단식. 무엇보다 자신의 육신을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지경으로 이끌어가는, 그리고 이 많은 양심적 시민들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이 길 위에 서 있는가. 과연, 지율 스님은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인가. 그것은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사랑에 대안이 없듯, 생명에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지율 스님을 살리는 것말고 다른 대안은 없다. 그를 살리는 것이 천성산을 살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지율 스님을 어찌할 것인가? 나는 이제 말한다. 국가권력의 수행 주체,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를 걸어나와 지율 스님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단식을 멈추시라고 말해야 한다. 또 자신의 약속 파기와 국가권력이 벌여온 그동안의 파행에 사죄해야 한다. 자이툰 부대까지 날아가 침략 전쟁의 뒷수습에 징발된 불쌍한 이땅의 아들들을 끌어안았던 그가 지율 스님 앞에 무릎꿇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무뢰한의 무릎 사이를 기던 어린날의 한신 장군처럼 냉혹한 약육강식의 국제질서에 무릎꿇지 말고, 이땅의 통치자 경제 유령 앞에 무릎꿇지 말고, ‘진리’로 살아 있는 완전한 인간 정신 앞에 꿇어야 한다. 그 자리, 곧 이 불모의 땅에 희망이 새롭게 돋아날 것이다. 정말, 시간이 없다. 이계삼/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왜냐면 |
지율 스님을 어찌할 것인가 |
돌이켜 보면 지율 스님이 천성산을 지키기 위해 세상으로 나오면서부터 벌어진 이 모든 일들은 이땅의 절망과 희망의 지점을 정확하게 비춰주었다. 그가 비추어 낸 이땅 절망의 지점이란, 통치자와 경제 유령의 실체다. 우리는 경제 유령의 십자군이 되어 날마다 진군해 간다. 경제 유령은 이 세계를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삭막한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침략 전쟁의 하수인 노릇도 마다지 않으며, 참수의 목전에서 “살려달라”는 동족의 처참한 절규도 외면한다. 개펄을 메워 수억조의 생령을 생매장하고, 산천을 뒤집고 거기에 깃든 생명체를 내쫓아 생긴 돈을 나누어 갖는다. 3년 전, 그가 천성산 수행도량을 떠나 홀로 저잣거리에 섰을 때 세상사람들은 지율 스님의 모든 노력을 다만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그것은 이 싸움의 상대가 결코 중단을 모르는 막강한 관성을 가진 ‘국책사업’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로 이 싸움은 이땅의 실질적인 통치자와의 전면적인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천성산 계곡에서 뛰어노는 그 조그마한 도롱뇽을 앞장세웠다. 사람들은 코웃음쳤다. 사람 손가락 하나 크기의, 돈도 안 되는 도롱뇽 한 마리가 어찌 이 수조원짜리 인간의 ‘역사’를 멈출 수 있냐고. 그러나 스님은 인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고행으로 호소했다. 그리고 눈곱만치의 폭력과 타협과 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인간정신의 위대함과 그것이 품은 사랑의 크기 앞에 대통령이 약속했고, 사업이 잠시 멈추기도 했고, 무엇보다 40만이 넘는 시민들이 거대한 물결로 공명했다. 아직껏 없었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꿈틀거리기도 했다. 이것이 지율 스님의 실천이 비추어낸 이땅 희망의 지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지 못했다. 권력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때로는 무시와 냉소로, 때로는 약속과 거듭된 파기로 이 물결을 거슬렀고,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경제’라는 유일신의 강력한 엄호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경제 유령의 철권통치가 심어준 습관적인 의식-무기력감에 서서히 젖어갔다. %%990003%% 그는 왜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가. 78일째의, 아직도 진행 중인 총 219일의 단식. 무엇보다 자신의 육신을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지경으로 이끌어가는, 그리고 이 많은 양심적 시민들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이 길 위에 서 있는가. 과연, 지율 스님은 다른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인가. 그것은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사랑에 대안이 없듯, 생명에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지율 스님을 살리는 것말고 다른 대안은 없다. 그를 살리는 것이 천성산을 살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지율 스님을 어찌할 것인가? 나는 이제 말한다. 국가권력의 수행 주체,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를 걸어나와 지율 스님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단식을 멈추시라고 말해야 한다. 또 자신의 약속 파기와 국가권력이 벌여온 그동안의 파행에 사죄해야 한다. 자이툰 부대까지 날아가 침략 전쟁의 뒷수습에 징발된 불쌍한 이땅의 아들들을 끌어안았던 그가 지율 스님 앞에 무릎꿇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무뢰한의 무릎 사이를 기던 어린날의 한신 장군처럼 냉혹한 약육강식의 국제질서에 무릎꿇지 말고, 이땅의 통치자 경제 유령 앞에 무릎꿇지 말고, ‘진리’로 살아 있는 완전한 인간 정신 앞에 꿇어야 한다. 그 자리, 곧 이 불모의 땅에 희망이 새롭게 돋아날 것이다. 정말, 시간이 없다. 이계삼/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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