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4.17 21:42 수정 : 2005.04.17 21:42

노동조합 즉, 노동계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노조가 있는 사업장에서조차 비정규직 문제를 단체교섭의 대상에 올리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 정규직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다. 대한민국의 최대 강성노조도 대한민국의 최소 약성자본에 굴복해버리는 현실에서, 노동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자들의 대단결은 필수적이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노동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무형의 금에게 저가로 판매해 오던 사회를 요동치게 했다. 그리고 인류는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체제 내에서 노동과 자본의 대등관계를 모색해 왔다. 북유럽 사회가 이를 현실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류’(善流)와는 달리,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의 ‘악류’(惡流)는 노동을 자본에 종속시키며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전가의 보도를 내세우고 있다. 미국의 것에 익숙한 우리는 1997년 구제금융 위기를 계기로 ‘청출어람’ 행태를 보이며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고스란히 수용했다. 그리고 8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양극화 현상 심화라는 재해를 겪고 있다. 그 재해의 근본 요인이 비정규직 확산에 있다면, 당면한 우리 사회의 시급한 과제는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 아래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데 있다.

첫째,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고부채 차입 의존적 자본 축적과 그에 따른 이윤율의 급격한 하락이라는 유동성 위기구조 형성의 모든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했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노동소득 분배율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 결과에서 우리의 분배구조는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며, 노동시장 유연화를 감수한 채 외환위기 극복에 매진한 노동계에 대한 명백한 배신을 엿볼 수 있다.

둘째, 차별의 핵심인 임금 문제에 관해서 살펴보자. 실상, 상용 노동자와 기간제 노동자의 임금은 동일해서도 안 된다. 시한부 고용에 따른 기간제 노동자는 계약 연장 여부의 불확실성으로 소비력은커녕 온전한 소비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상용 노동자의 경우 상대적으로 계약 연장 등 장래의 고용불안에서 자유롭고, 미래의 수입원이 특정한 사유 없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비행위가 가능하다. 이러한 모순적 구조는 노동자 개개인이 ‘고용안정의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고임금’ 양자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바로잡아야 한다. 이 때 노동자는 자신의 사정에 의해 고용조건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여기서 차별이 아닌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셋째, 노동조합 등 노동계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재 산별노조는커녕 노조 조직률이 전체 노동자의 10%를 약간 넘는 현실에서 노사관계가 대기업에 국한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노조가 있는 사업장에서조차 비정규직 문제를 단체교섭의 대상에 올리지 못하는 것은 정규직들의 명백한 이기주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비정규직 문제를 두고 민주노총이 올해 임단협에서 보여주는 노력은 충분히 인정해야겠지만, 상급 지도부의 인식과는 달리 공공부문과 금융계의 처지는 그렇지 않다는 점은 아마 노동계 전반의 공통된 인식일 것이다. 정규직 대 비정규직 구도를 통한 노동판 ‘이이제이’를 자본가들이 구사해 오고 있는데, 여기서 정규직에 대한 ‘주문’이 정규직의 이기주의로 비칠 수 있음에 조심해야지만, 한국 사회 운동의 큰 맥인 노동계에 중소기업 등 하청업체 노동자와의 연대를 주문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최대 강성노조도 대한민국의 최소 약성자본에 굴복해버리는 현실에서, 노동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자들의 대단결은 필수적이다.

차이가 차별이 되는 순간, 노력의 무용론이 제기되는 것을 나무라는 자는 없을 터이고, 있어서도 안 된다. 거기에 희생의 고통에 허덕여 회생이 불가능한 자에게 또 한 번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형언할 수조차 없는 불합리다. 신자유주의라는 기차는 인간성이라는 레일을 탈선한 채, 자본의 레일을 통해 경제동물이 기다리는 천민 자본주의라는 종착역을 향해 치닫고 있다. 차별의 상응 개념이 무엇인지 찾아 보라. 17, 18세기에도 존재하던 평등이었다. 그 평등은 지금껏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양대 중추의 하나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철폐를 외쳐야 하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 자유시장 경제 등은 너무 과분한 것 아닌가.


송진영/동아대학교 법학과 4학년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