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
병영체험은 삼청교육이다 |
재반론-신달수씨의 ‘병영체험은 삼청교육이 아니다’를 읽고
복종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러운지는 굳이 안 당해 봐도 안다. 그렇다면 왜 병영체험인가. 군대는 계급집단이다. 우리 사회가 아직 ‘수직적 인간관계’를 중시한다고 해도 친구들과 잘 지내는 법,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신달수씨의 글을 잘 읽었다. 그러나 병영체험을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신씨 역시 오해하고 있는 듯해 몇 자 적는다. ‘폭력학생’들의 병영체험을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삼청교육대’와 비슷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이나 ‘절차상’ 문제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왜 하필 병영체험인가’라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 교육 방향의 문제다.
신씨의 말처럼 ‘일반적인’ 학생이었던 나 역시 중고등학생 때 ‘극기 훈련’의 하나로 ‘야영’을 한 적이 있다. 재미는 있었으나 그것은 친구들과의 외박 때문이었지 오롯이 ‘극기 훈련’만을 생각했을 때 좋은 기억은 아니다. ‘잘할 수 있습니까?’와 계속되는 기합으로 기억되는 극기 훈련에선 왜 이걸 해야 하는지 내게 묻지 않았다. 그때 내가 ‘극’해야 할 것은 딸리는 몸과 넘쳐나는 불만이었다. 그곳에서의 주된 교육 방법은 신체상의 ‘고통’과 ‘복종’이었다.
왜 하필 병영이냐고 묻는 이유가 여기 있다. ‘복종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러운지’는 굳이 안 당해 봐도 안다. 그렇다면 왜 병영체험인가. 군대는 계급집단이다. ‘까라면 까’와 ‘너도 한번 당해 봐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의식의 바탕이 무언가. 결국은 상명하복, 윗사람에 대한 복종이 아닌가. 아무리 우리 사회가 아직 ‘수직적 인간관계’를 중시한다고 해도 친구들과 잘 지내는 법,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최전방 부대 체험, 땅굴 견학, 공군 체험 등의 체험 내용 역시 생뚱맞다. 요즘엔 초등학생들도 땅굴 견학을 하지 않는다. ‘더불어’를 가르치려는 과정에 웬 반공수업이고 육·해·공군 홍보행사란 말인가. 게다가 장애우와 함께하는 병영체험이라니, 장애우는 원래 몸이 불편해서 군대에 ‘못’ 간다. 장애우는 또 무슨 죈가. 함께하는 장애우가 병영체험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기 위해 ‘징집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이 폭력을 어디서 배웠을까. 결국은 어른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겠는가. ‘맞아야 정신 차리’고,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병영 체험 아이디어의 출처가 그 폭력의 가장 깊은 뿌리는 아닐까. 일전에 <한겨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학생과 부모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이 반성하더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좋은 시도라고 본다. 우리의 이런 논의는 모두 학교폭력을 방지하고, 가해 학생이나 피해 학생 모두를 치유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을 모르는 가해 학생 역시 치유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치유의 과정은 ‘복종’이 아니라 ‘더불어’를 가르치는 방향이어야 할 테다. 이유 없는 복종이란 결국 그 아이들이 벗어나야 할 ‘일방적인 지시’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예복/서울 관악구 신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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