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영어가 상류층 구별짓는 이데올로기가 돼 버린 현실공교육의 양적 확대가 사교육을 흡수하기는커녕
더욱 빠른 속도로 확장시킬 것이다
대통령 될 사람은 광풍 잠재워야지 부추겨선 안 된다 너무 많은 사교육비가 집안 살림에 짐이 된 현실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온 사람들이 나라에서 영어 교육을 책임져 영어 사교육비를 줄이겠다고 한다. 누구나 고등학교만 나오면 영어 대화가 가능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이명박 후보는 “일주일에 몇 시간 공부하는 체계로는 안 된다”며 영어 교육 강화를 내걸었다. 정동영 후보는 영어 학습 시간을 900시간에서 2700시간으로 확대하겠다고 공약한다. 문국현 후보도 조기 영어 교육 확대를 약속한다. 대선 후보들이 가계에 커다란 부담이 되는 영어 교육 문제에 정책을 내놓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공약은 우리 언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영어가 ‘세계어’라고 하나 세계 모든 사람이 배워야 하는 말이란 뜻은 아니다. ‘세계어’는 없으며 단지 세계적 패권을 쥔 나라의 언어가 있을 뿐이다. 영어는 실질적으로 미국말이다. 미국 연방 통계국 집계로, 미국 안에서조차 영어를 유창하게 쓰지 못하는 인구가 2007년 현재 약 1100만명이며 이 수는 빠르게 늘고 있다고 한다. 서부 캘리포니아에서는 가정에서 영어 아닌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 전체의 43%나 된다. 세계화 시대라며 영어 숭배를 정부가 장려하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마저 발벗고 나서는 것은 우리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조기 유학, 어학 연수로도 모자라 영어로 태교를 하며, 자녀교육을 한답시고 집안에서도 영어를 쓰고, 여러 지자체에서는 영어마을을 두어 영어 쓸 환경을 만든 실정이다. 영어 못한다고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할 게 아니다. 영어로 잘 말하기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말차례, 소리 조직, 어휘 체계 어느 것 하나 우리말과 같거나 엇비슷한 점이 없다. 특히 어휘에서 그 미묘한 뜻의 차이를 알고 제대로 표현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어는 우리 삶 어느 곳에나 언제나 함께 있다. 그것은 수많은 사물들의 한 부분이 아니다. 한 언어는 겨레의 역사와 문화를 드러낸다. 그것을 배우고 내면화하고 자유롭게 쓰려면 수많은 훈련과 도야가 필요하다. 특히 말하기는 구체적 삶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외국문화 이해를 깊이 내면화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영어를 잘하려면 미국식 삶의 방식과 가치에 익숙한 사람이 돼 있어야 한다. 이는 곧 우리 삶의 방식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잃어 버리는 것이다. 모두 영어 말하기를 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잘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영어는 경쟁력이나 선진화의 도구가 아니다. 언어를, 특히 영어를 이렇게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보는 관점은 매우 좁은 생각이다. 우리보다 영어를 못하는 일본은 영어 배우기에 열을 내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 필리핀은 영어를 잘해도 필리핀 전체 인구의 10% 가량이 돈을 벌고자 국외로 나가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 점점 번져가는 영어 숭배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영어가 상류층이 되는 주요 통로라는 점에 그 큰 원인이 있다. 신정아씨가 출세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미국 박사 학위였고 유창한 미국말이었다. 모든 이가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거듭된 선전은 상류층이 미국말 배우기에 쓸 시간과 돈이 모자라는 하류층과 스스로를 차별화하려는 이데올로기라는 측면도 있다. 최근에 입시 부정 문제가 불거진 외국어고를 외국어 영재 교육 기관으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좋은 대학에 가서 상류층이 되는 통로로 여기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교육은 길게 보며 우리의 앞날을 설계하는 일이다. 한번 바뀌면 쉽게 되돌려놓기 어렵다. 공교육의 수업 시간을 늘린다면 사교육에 대한 더욱 큰 수요를 유발할 것이다. 미국말이 상류층이 되는 잣대인 현실에서 많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더 배우려 할 것이다. 우리의 지난 경험을 보아도 영어 공교육의 양적 확대는 사교육을 전혀 흡수하지 못했다. 만약 후보들이 내건 공약대로 정책이 시행된다면 사교육비는 더욱 빠른 속도로 불어날 것이다. 영어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보자. 영어 말하기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도 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럼으로써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다. 또 영어 숭배는 이미 우리 문화와 삶의 정체성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다. 우리말은 물론 우리의 삶과 문화도 얕보는 생각에 스스로 빠져들고 있다. 대통령이 될 사람은 휘몰아치는 영어 숭배의 미친 바람을 먼저 잠재워야 한다. 점점 무시당하는 우리말과 글을 책임지고 살리겠다는 공약을 내거는 대통령 후보는 어디 있는가. 김영환/부경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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