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간첩’ 색출 목적으로 만든 주민등록말소지금은 거리에 나앉을 극빈자를
사회시스템 밖으로 내모는 제도
주거지 없단 이유로 투표권 안줘서야 40살은 불혹, 50살은 지천명, 60살은 이순이다. 그러면 65살은 무엇이냐? 답은 ‘지공’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여기서 지공은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는 나이’라고 한다. 한국의 노인복지제도가 일천하여 겨우 지하철이나 무료로 태워주는 것일 뿐이라는 자조감이 배인 유머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65살이 되면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우스개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65살이 되어도 지공의 대열에 끼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있으니 그들은 주민등록말소자들이다. 기초노령연금제도가 도입돼, 내년부터 70살 이상 노인의 60%가 최고 월 8만4천원의 기초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내년부터 70살은 기초노령수급연령이 되니 ‘기연수’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가난해도 ‘기연수’의 대열에 낄 수 없는 노인들이 있으니, 그들 또한 주민등록말소 어르신들이다. 뿐만 아니라 주민등록말소자들은 기초생활보장, 주거지원, 의료급여 등 다른 어떤 사회보장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설령 장애인이 되었을지라도, 어느 행정기관에 가서 장애판정신청을 해야 될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장애판정조차 받을 길이 없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주민등록말소자들은 16만원에 이르는 장애수당을 비롯하여, 장애인이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에서 제외돼 있다. 주민등록말소는 ‘엄연히 살아있는 사람’을 국가권력이 국민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주민이 아닌 것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민등록말소는 자녀교육, 군입대, 금융계좌 개설, 주택임대차계약서 작성, 취업, 4대보험 가입, 사회보장 수혜 등의 모든 국민적 권리와 의무를 행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으로서, ‘살아있는 인간’을 사회시스템으로부터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가혹하게 사회로부터 배제된 상태에 있는 주민등록말소자는 2004년에 70만명에 이르렀다. 다행히 최근에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아직도 64만명의 주민등록말소자가 사회적 배제상태에 방치돼 있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주민등록말소자의 38%는 채무독촉을 피해 신분을 숨겨야 하는 채무불이행자들이며, 23%는 전월세보증금을 다 소진하고 거리에 나앉을 지경에 처한 주거빈곤층이고, 그 다음은 주거부정의 방랑자들이다. 아마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라는 노래가사로 유명한 시인 김삿갓이 현대에 살고 있다면 등재된 주민등록지에 살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주민등록말소자의 낙인이 찍힌 채 살고 있을 것이다. 주민등록말소제도는 용공분자 색출을 목적으로 45년 전에 군사정부 시절에 도입되었는데, 지금 이 제도는 간첩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너무 가난해 주민등록 등재가 가능한 주거지에서 살 수 없는 노숙인, 채권독촉을 피해 주거지를 노출시킬 수 없는 채무불이행자들을 때려잡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주민등록말소자에게 기초생활보장 번호를 부여한 후에 사회보장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한다고 하나, 실제 현장에서는 사회보장 수혜는커녕 투표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가장 큰 존재이유는 시장시스템에 의해 사회적 배제상태로 내몰리기 쉬운 사회적 취약계층을 주류사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취약계층을 적극적으로 주류사회로 끌어들이기는커녕 오히려 국가권력이 나서서 ‘등재된 주민등록지에 살지 못하는 계층’의 국민성과 주민성을 부정하고, 사회적으로 배제상태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12월19일은 대통령선거일이다. 그런데 64만명의 국민은 등재된 주민등록지에 살고 있지 않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국내에 엄연히 거주하지만, 공권력에 의하여 투표자격을 박탈당하고 있다. 부재자 투표나 재외국민투표는 가능한데 왜 주민등록말소자의 투표는 불가능한 것인가? 등재된 주거지에 지속적으로 거주하지 않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가 투표권을 박탈할 정당한 사유가 되는 것인가? 국민의 권리인 투표권이 행정편의성의 희생물이 되어도 되는 나라가 법치국가인가? 정부는 이번 대선 때 주민등록말소자도 투표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류정순/한국빈곤문제연구소장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