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대학개혁의 고유명사가 된 ‘서남표’내막을 들여다보면 미국식 경쟁
무차별 수용의 장밋빛 미래는
성적순 줄세우기·국문과서 영어 강의
캠퍼스 공사장 만들기·재벌 회장 박사주기… 나보다 꽤나 연배가 높은, 그것도 흔히 일컬어 사회 지도급 인사를 호칭 없이 거명해도 결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지닌 상징성 때문이다. ‘미스터’ 서남표는 전직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였으며 현직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총장이지만 ‘그냥’ 서남표는 목하 한국 대학 개혁의 아이콘이다. 한때 ‘미원’이라는 고유명사가 ‘조미료’라는 일반명사로 통용되었듯이 ‘서남표’는 ‘대학 개혁’과 발음만 다르지 뜻은 같다. 아니 ‘같아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고 방학은 연간 넉 달이며, 정년심사 통과하면 65세까지 만고강산인” 한국 대학을 정신 차리게 하려면 서남표를 따라해야 한다고 연일 대다수 언론이 총출동한 마당이다. 그럼에도 이 업종에서 밥벌이하는 내가 한마디 하려는 것은 나름대로의 연유가 아주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 먼저 밝힌다. 한국 대학 문제 많다.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 멀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왜 꼭 서남표식이어야 하느냐’다. 서남표식 대학 개혁의 상표는 경쟁이다. 학문 경쟁을 위해 교수는 죽어라 연구해야 하고, 대학은 교수 연구를 뒷받침하고 훌륭한 학생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죽어라 돈 벌기 경쟁을 해야 한다. 그러나 경쟁이라는 상표가 붙은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들여다보면 서남표식은 정확하게 미국식이다. 누구 말대로 경쟁은 아름다운 것이고, 이리저리 들여다 본 미국 대학은 적어도 실용성이라는 점에서는 참으로 장점이 많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경쟁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며 미국 대학 시스템이 모두 좋은 것도 아니다. 미국 대학들 스스로도 자성하는 목소리가 결코 작지 않다. 미국식은 충분하게 고려하고 연구할 대상이지 우리가 그대로 베껴 써야 할 대상은 결코 아니다. 잘못하면 뱁새가 걷는 황새의 걸음걸이이고 두루미가 먹어야 하는 우아한 접시 위의 음식이다. 역사적으로 보건대 개혁과 발전의 문제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성공한 상대방을 그대로 따라 해서는 결코 성공한 상대에 근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엔간히 올라가면 장하준 교수 말대로 사다리를 차 버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도 잘 맞지 않아 내부적 진통이 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국식 대학 개혁의 무차별 수용이 가져올 ‘장밋빛’ 미래는 이미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일등부터 몇 등까지 일렬종대로 줄세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재벌 회장에게 명예박사 주기, 등록금 올리기, 캠퍼스를 신축공사장으로 만들기, 대학을 뻥튀기 하기 위해 홍보회사 돈 벌게 해주기, 국문과에서 영어로 강의하기, 대학생들 스타벅스 커피 마시게 하기, 강의 대충하고 인용 안 되는 논문 양산하기, 우후죽순 학술지 만들기 경쟁 …. 오래 전 군대시절 이야기다. 의무병은 배가 아파도, 소화가 안 돼도, 심지어는 맹장염에 걸려도 부채표 활명수를 주었다. 서남표는 서남표대로 훌륭하겠지만 서남표가 대학 개혁의 부채표 활명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개혁이란 봄비처럼 스며들어야지 장맛비처럼 쏟아 부어서는 다 쓸려가고 남는 게 없다. 동기는 강한데 이해를 잘 못하는, 즉 용감하지만 무모한 사람들이 자전거 타고 가는 형국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무작정 페달을 밟아대던 소시적 자전거 타기 배우던 생각이 난다. 그래서 물론 배우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꼭 무릎이 까지고 시궁창에 처박힐 이유는 없다. 하여, 나 자신에게 묻는다. 얼마나 밉보였기에 꼭 무릎 까지고 시궁창 처박혀야만 한다는 소릴 듣고 살아야 하나? 그것도 재벌언론으로부터. 강명구/아주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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