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07년 8월21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1975년 사형집행을 당했던 8명의 유족 46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해 국가의 불법행위 사실을 인정하고 소멸시효 주장을 배척하며, 유족들의 청구를 일부 인용했다. 판결 이후 세간에서는 손해배상액이 이자를 포함해 637억원에 이른다는 점을 두고 떠들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직접 소송대리하며 유족들이 32년여 세월 동안 겪은 뼈저린 억울함과 고통을 가까이에서 느꼈던 필자로서는 감히 손해배상액의 다과를 입에 올릴 수가 없다. 유족들은 가족이 갑작스럽게 체포·구속되었다 주검으로 돌아올 때까지, 단 한번의 면회도, 서신 왕래도 할 수 없었다. 법정 방청도 가족 1인으로 제한되었고, 법정에서 남편이 고문으로 허위자백했음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세상에 알리려 했으나, 구명운동마저 차단됐다. 그리고 변호인들의 모든 증거신청도 기각된 채, 일방적이고 형식적인 재판을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 대법원까지 차례로 받아야 했다. ‘인권의 최후 보루로 믿었던’ 대법원마저 사형을 확정시켰을 때, 유족들은 절규하면서도 판결이 끝났으니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려니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가는 그 기대마저 짓밟고 재심청구 기회마저 박탈한 채, 선고 다음날 새벽 8명을 차례로 사형집행하고, 그 주검마저 일부는 무단으로 화장해 버렸다. 그러나 실상 유족들의 고통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 이후의 삶을 알았다면 차마 살지 못했을 거라는 유족들의 절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랴. 인혁당 재심 재판에서도국가는 소멸시효를 이유로
배상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국가범죄의 구차한 항변을
방관하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 기관의 감시는 집, 직장, 학교로 더 삼엄해졌고, 이웃들에게 간첩 가족이라고 소문을 내며 왕래를 못하게 하였다. 유족들은 친구, 친척과의 왕래마저 차단되어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고, 직장이나 학교에서도 온갖 차별, 냉대를 당했다. 당시 동네 꼬마들이 유족 중 만 세살배기 아들을 간첩의 아들이라며 동네 나무에 묶어두고 총살을 하는 장난을 하고, 이를 본 이웃 어른들도 웃을 만큼, 냉전사회는 유족들에게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까지 지속된 기관의 감시 속에서, 유족들은 결코 자유와 민주를 누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 간에도 상처가 될까 두려워 처참한 경험을 나누지 못하고 혼자 삭이며 외롭게 살았다. 한 집안의 가장이 갑자기 사라져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생활을 했음은 물론이다. 내 인생 전부에 해당하는 시간보다 긴 시간을 고통스럽게 살아왔던 유족들의 인생 하나하나를 마주하면서, 나는 수십억원을 준다 해도 내 평탄했던 삶과 유족들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유족들에게도 다액의 손해배상액은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작은 위로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사랑하는 남편, 아버지, 형제의 목숨과 바꿀 수도 없는 것이며, 일그러진 자신의 32년여 세월에 대한 보상도 결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혁당 재건위 재심사건에 무죄판결이 선고되던 날,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이 선고되던 날, 유족들이 터뜨린 오열과 눈물은 바로 이로 인한 회한과 슬픔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인혁당 재건위 재심사건에서 무죄판결을 선고받고 항소하지 않고서도, 손해배상 재판에서는 소멸시효를 이유로 배상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재판부는 국가의 주장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라며, “구차하게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워 그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우리가 불운하게도 수십 년 동안 냉전, 독재 시대를 겪어오는 동안, 국가의 반인권적 범죄로 야기된 중대한 피해는 비단 인혁당 재건위 사건 하나에 그치지 아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여전히 이러한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면서, 국가가 반인권적 범죄행위에 대해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구차한 항변을 하도록 방관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의 반인권적 범죄행위로 인한 피해를 사회적·제도적으로 해결하고 최소한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번 17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에서는 반드시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김미경/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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