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
[왜냐면] 동학농민혁명과 한-미 FTA / 조광환 |
1894년 동학 농민혁명은 불평등한 신분구조 속에서 부패한 지방수령과 양반들의 수탈과 억압에 시달리던 민중들이 봉건제도 타파를 외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섰던 반봉건 반제국주의 투쟁이었다. 전라도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군은 황토현에서 정부군을 무찌르고 정읍·고창·무장·영광·함평을 파죽지세로 함락시키고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일본은 톈진조약을 구실로 군대를 인천항에 상륙시켰다. 이에 농민군 지도부는 외세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자 정부와 강화조약을 맺고 일단 전주에서 철수하였다. 그런데도 일본은 청-일 전쟁을 일으켜 이 땅을 침략의 전쟁터로 만들었다.
전봉준 등 농민군은 전라도 삼례에서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겨울 북풍이 몰아치는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죽창을 든 수만의 농민군은 신식 총으로 무장한 일본과 관군한테 비참하게 쓰러져 갔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억압해 온 불평등한 신분제도의 철폐라는 소중한 열매를 가져왔다. 그들이 보여준 자주적 실천은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뜻 깊은 것은 올바른 역사 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교훈을 남긴 것이다. ‘민중’은 피지배계급으로서의 일반대중을 가리킨다. 지배계급도 때론 스스로 역사발전의 주체라 생각하고 개혁을 주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중’이 벌인 개혁과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집회로 전국이 어수선하다. 정부와 보수언론들은 입을 모아 불법 폭력시위 엄단을 부르짖고 폭력적이고 자극적 장면만을 연일 보도한다. 그러나 농민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원인을 진지하게 짚는 성찰은 간 데 없다.
집회가 열리는 거리에는 갑오년 동학농민군처럼 생존권을 확보하고자 몸부림치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있다. 전문가와 민중들의 수많은 자유무역협정 반대 주장에 대해 묵살로 일관하다 11월22일 반대집회 참가자 42명을 ‘과격시위’ 운운하며 구속한 정부,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성사되면 가장 큰 피해자는 농민이라면서도 농촌문제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권, 만석보 물세 감면을 요청했던 고부농민들의 처절한 애원을 묵살하고 무력으로 짓밟았던 조병갑, 사람 대접과 생존권을 요구하며 일어섰던 동학농민군을 압살하기 위해 외국군을 끌어들었던 민씨 정권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은 나만의 착시현상일까?
112년 전 생존권을 외치며 일어섰던 동학농민군들은 적게는 20만 많게는 30여만 명이 이름 없이 쓰러져 갔다. 작금의 상황도 어찌 보면 비슷하다. 한-미 자유무역 협상 결과에 따라 갑오년 그 때보다 수십 배 많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내몰릴지 모른다. 개혁을 외치며 출범했던 노무현 정권이 민중을 외면한 개혁은 결국 실패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다시 한번 상기하길 바란다. 그래서 제2의 김홍집 친일정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땅에 또다시 제2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