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대학입시라는 열아홉살 고3의 스트레스도 버거운 아이들에게 이제는 열여섯살 중3의 특목고 입시 경쟁에 더해 열세살 초등학생의 국제중 입시경쟁까지 추가된 것이다. 특목고 논란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서울시 교육청은 끝내 ‘국제중’ 설립을 허용하기로 했다. 교육부를 비롯한 여러 민간 교육단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말이다. 현행 초중등 교육법을 보면 국제중과 같은 특성화 학교의 설립 인가권은 시·도 교육감에게 있다. 따라서 공정택 교육감의 국제중 설립 추진이라는 합법적 행위를 막을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어 보인다. 이제 앞으로 닥칠 현실은 우수 인력 개발과 교육의 질 향상이라는 그럴싸한 목적 아래 펼쳐질 입시경쟁의 릴레이에 참가하는 나이 어린 아이들의 모습뿐일 것이다. 대학입시라는 열아홉살 고3의 스트레스도 버거운 아이들에게 이제는 열여섯살 중3의 특목고 입시 경쟁에 더해 열세살 초등학생의 국제중 입시 경쟁까지 추가된 것이다. 서울시 교육청은 수월성 교육의 필요성을 이유로 국제중 설립을 허용한다지만, 그 생각이 현실에서도 부합할지는 의문이다. 부산국제중과 경기 청심국제중의 지난해 입학 경쟁률이 각각 12 대 1, 21 대 1을 기록한 것만 보아도 훨씬 빨라진 입시과열의 폐해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평준화 교육 시스템의 질적 향상을 위한 것이라는 서울시 교육청의 주장은 그 자체로만 본다면 틀린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시스템과는 무관하게 건재하는 현실의 학벌주의는 교육청 주장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교육청이 아무리 좋은 목적과 선발 방식을 내놓아도 이에 응답하는 이들은 초등학생 자녀를 둔 현재의 어머니들이다. 12년 뒤 명문대 진학이라는 목표 아래 자녀 교육을 이끄는 학부모들의 교육열을 비판하자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이 되어 어머니들을 그렇게 만든 학벌주의의 폐단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 사회는 역설적이게도 나이 어린 초등학생들까지 입시지옥으로 내몰아 가면서, 그 문제의 치료라는 짐까지 아이들에게 떠맡기고 있다. 그 단적인 사례가 최근 〈한겨레〉에도 보도된 강릉대 전자과의 일화다. 교수진과 재학생들의 치열한 노력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그 다른 한편에선 이른바 명문대와는 거리가 먼 강릉대에서 미국 명문 대학원 입학의 돌파구를 뚫어 학벌주의라는 병폐를 극복해야만 하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 읽혀 서글픈 느낌이 든다. 결국 교육청의 국제중 설립 결정은 그럴싸한 목적 아래 아이들을 입시경쟁 릴레이 안으로 던져 넣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매년 수능시험철만 오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사가 있다. 입시경쟁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의 자살 소식이다. 입시라는 짐을 등에 짊어지고 버티다가 끝내 쓰러져 버린 가여운 영혼들이다. 그 아이들이야말로 어쩌면 지금 왈가왈부하고 있는 이 모든 문제들의 산증인이자 가장 큰 희생자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입시, 학벌주의 등이 식상하다며 대다수 사람들이 어린 영혼의 죽음을 외면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런 무관심의 현실 앞에 펼쳐질 암울한 미래를 상상해 본다. 만일 십여년 뒤 초등학교에 진학한 내 아이가 명문대 진학과 학벌주의가 만든 입시경쟁 릴레이의 무게에 못 이겨 19살이 아닌 13살에 죽음을 택한다면, 과연 그 아이의 죽음 앞에 어느 누가 눈물로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박은경 /서울여대 환경생명디자인 2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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