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24 21:22
수정 : 2006.08.24 21:22
왜냐면
된장녀가 여대생이 아니라 남성 대학생이었다면, 20대의 젊은 여성이 아니라 젊은 남성이었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어떠했을까.
22일치 왜냐면에 실린 ‘괴물과 된장녀, 그 공통점 뒤에는’이란 글을 보고 참 반가웠다. 열풍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된장녀 조롱하기’에 대한 거의 최초의 비판적 접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된장녀와 영화 <괴물>을 비교하여 서술한 것은 정말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포름알데히드와 신용카드, 사회적 약자와 복학생, 뉴스와 자본주의라는 두 주제에서 소외나 일상성, 구매력이라는 알짜말(키워드)을 끄집어낸 것도 좋았다. 그러나 글을 두세 번 읽어보면서 그 둘의 묶임이 조금 불안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 글의 모티프인 ‘괴물’에 대한 필자의 ‘독자적 상징화’로 일반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포름알데히드와 신용카드를 비교서술한 부분은 그나마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된장녀를 돈을 앗아가는 ‘괴물’로 비유한 부분이나, 일상성과 자본주의를 엮어 설명한 부분은 처음 이 글을 접한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맨 마지막 단락에서 말하고 있는 ‘된장녀와 대다수 젊은 여성의 구별짓기’ 부분도 이해가 쉽지 않다. 최서윤씨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 본다면 된장녀는 ‘예쁜 외모와 준수한 학벌, 그리고 중상류층 뉴요커의 이야기를 공감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배경을 지닌 소수’로 규정된다. 그러나 과연 된장녀의 범주를 이렇게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된장녀가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문화를 누리고 그를 자랑처럼 여기는 일부 여성을 비하하는 말임을 생각해 본다면 외모나 학벌, 경제적 배경 등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아닌가? 경제적 배경이 갖춰지지 않아도, 외모가 따라주지 않아도, 학벌이 좋지 않아도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문화는 누릴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런 논리의 밑바탕에 마치 된장녀의 이미지가 ‘일반적인 대다수 젊은 여성’이라는 상대적 우월 집단의 이미지를 변질시킬까 두려워 그들을 아예 내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여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최서윤씨의 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된장녀가 대다수 여성들의 진실을 가리고 있다’는 부분이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된장녀’란 된장녀 그 자체가 아니라 된장녀를 통해 여성주의에 흠집을 내려는 가부장적 남성사회를 에둘러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된장녀라는 단어가 평소에도 어느 여대와 여성가족부를 비하하기를 서슴지 않는 네티즌들―그 대다수가 남성 화자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에 의해 형성되었고, 어찌보면 시시껄렁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보수 언론들이 앞 다투어 전문가를 내세워 가며 ‘된장녀 사회학’을 너나없이 떠들어대는 것을 보면서 ‘저기에는 음모가 숨어 있어!’라고 말하는 건 단순히 예민한 행동일 뿐일까.
만약 된장녀가 여대생이 아니라 남성 대학생이었다면, 그리고 20대의 젊은 여성이 아니라 젊은 남성이었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어떠했을까. 스타벅스 커피를 소비하고, 그 안에서 책을 읽는 그들을 가리켜 ‘신세기적 로맨티스트들’ 내지는 ‘뉴요커, 파리지앵에 대응되는 서울리안’,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이 시대의 멋진 직장인’ 따위의 수사들을 붙여대고 있지 않을까. 남성들의 소비에는 관대하면서 여성들의 소비에는 유독 ‘쫀쫀한’ 이 사회는 아직도 이해심이 한참 부족해 보인다.
한공 상욱/서울 강남구 수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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