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17 18:32
수정 : 2006.08.21 13:35
왜냐면
‘한국식’ 화장 논의에 반대하는 이유
‘묘지강산을 금수강산으로’. 매장과 화장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의 핵심을 이 표어만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도 아마 없을 것이며, 논쟁의 지향점도 이미 자명하다.
묘지강산이 되버린 국토를 금수강산으로 되살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매장 관습으로부터 탈피해서, 화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안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 형성과 확산과정은 상당히 일방적이라고 보이는데, 언론 보도만 보더라도 매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화장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자는 매장이냐 화장이냐 하는 찬반논쟁에 뒤늦게 끼여들고 싶지는 않으며, 단지 매장/화장 논쟁이 진행되는 ‘사회적 방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화장 찬성 주장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논지는 뭐니뭐니해도 매장이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방해한다는 것, 곧 땅 얘기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나, 지면상 여기에서는 지난 몇 십 년 남짓한 사이에 지어진 골프장의 면적이 이미 전 국토 묘지면적의 1/5을 차지한다는 사실만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데 아무튼 본디 의식(儀式)이나 의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상징의 덩어리’이며, 사회적 행위의 효율성, 기능성과 편리성 등과는 상극인 경우가 많다. 그런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 동안 인류가 무덤에 쏟아 부은 시간, 돈과 노력은 지극히 부질없는 것이다. 게다가 장묘란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죽은 자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것은 본디 산 자를 위한 것이다. 나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유한한 인간의 존재적 한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남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그런데 장묘를 둘러싼 제도가 더 이상 죽음을 의미 있게 다루고자 하는 공동체적 노력이 되지 못하고, 죽음과 죽은 자로부터 보다 신속하고도 깨끗하게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로만 여겨지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가치관의 전면적인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며, 이는 땅 문제보다 훨씬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죽음에 대한 의미 부여가 장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며, 그 방법이 꼭 매장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특정한 방법의 문제라기 보다는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과 보다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매장/화장 논의는 과연 얼마나 이런 문제의식과 관련되어 이루어지고 있는가 자문해 볼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진정 큰 문제는 장묘가 - 매장이던 화장이던 그 무엇이던 간에 -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서로 화해하고, 순화된 마음으로 이별할 수 있는 의례의 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 시민단체와 언론 등이 어떤 계몽적 의도를 가지고 특정 사안에 대한 캠페인을 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삶의 기본적 가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고, 어떤 것이 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쉽게 재단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너무나 분명한 선언적 캠페인이 깊이 침잠해있는 의식(意識) 차원의 중요한 문제들을 사장하고, 장묘 문제를 단순하게 행정 정책적 차원, 시민운동의 차원으로만 환원시켜버릴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화장을 ‘도덕적 우위’로 포장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하고자 한다. 이 문제를 계몽과 미몽, 선과 악 내지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구도로 끌고 가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죽은 자를, 나아가 우리 삶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난폭한 인위적 개입으로 변질될 우려가 많다. 게다가 계속적으로 새로운 장묘방식들이 권장되는데, 산골(散骨)얘기가 나오는가 싶더니 요즘은 수목장이 유행인가 보다. 이런 일들을 보면 우리의 장묘정책이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 결여된 상태에서 얼마나 단기적이고 거의 즉흥적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웅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매장과 화장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가장 큰 문제점 중 또 하나는 소위 주류적 의견과 ‘다른 합리적 의견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데 있다. 보다 풍부하고 건강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논쟁을 기대해 본다. 사실 그 결과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 과정 자체가 오늘 우리에게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사회적’으로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지금 진정 필요한 일이다.
천선영/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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