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과 미국에서조차 부도덕한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는 베트남 전쟁 당시 불려진 군가를 후세들에게 가르쳐 얻을 바가 과연 무엇인가. 이런 시대착오적인 사업은 중지되어야 하며, 이미 보급된 음반도 완전히 회수해야 한다. 보훈처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을 계기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당시 군에서 애창되었던 군가 12곡을 편곡하여 〈리멤버 유〉라는 앨범으로 콤팩트디스크(CD) 2만장을 제작해 국가유공자 단체와 각급 학교, 군부대 등에 보급했다고 한다. 국민이 낸 세금 1억2천여만원이 들었다. “조국 수호와 자유 수호를 위해 피 흘려 싸우면서 불렸던 옛 군가를 편곡해, 유명 가수들이 참여한 음반으로 제작·보급함으로써 국가 유공자에게는 추억을 되살려 자긍심을 높여주고 청소년 등 국민에게는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매체로 활용”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이 음반에 수록된 곡 중 ‘혈청지원가’가 문제가 되었다. 보훈처는 1953년 만들어진 작사·작곡 미상의 곡으로 설명했으나, 본디 이 곡은 일제강점기인 43년 ‘조선 지원병제 실시 기념’ 음반에 실린 대표적인 친일 가요로서,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에 백년설이 노래한 것이다. 문제가 된 ‘혈서지원가’와 ‘혈청지원가’의 1절 노랫말을 견줘 보자.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 부르네//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혈서지원가)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태극기 그려놓고 천세만세 부르자//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대한민국 국군 되기 소원합니다”(혈청지원가) 어떻게 광복이 된 뒤에도 대표적인 친일노래가 노랫말 일부만 바뀐 채 버젓이 불려지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마도 한국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전쟁 동원에 필요한 노래를 찾다보니 일제시대를 경험한 위정자들에 의해 손쉽게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또 군의 상층부가 대부분 일본군 경력을 가졌던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반역의 노래를 애국의 노래로 둔갑시킨 셈이다.〈리멤버 유〉 기획 초기에 보훈처는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일본풍 군가 및 표절 노래는 배제”하겠다고 했으나, 2003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음악의 진상’ 전시회에서 이미 ‘혈서지원’을 대표적인 친일가요로 공개한 바가 있으니 보훈처의 무성의가 딱하기만 하다. 이와 관련된 언론보도가 나온 직후 보훈처는 부랴부랴 음반을 보급한 곳에 ‘혈청지원가’에 대한 부연 설명과 함께 공개적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협조를 구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의 음반에 실린 12곡 전체를 살펴본 결과 이 사업은 처음부터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먼저 보훈처가 밝히고 있는 사업의 취지가 문제다. 광복 후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한국전쟁과 미국에서조차 부도덕한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는 베트남 전쟁 당시 불려진 군가를 후세들에게 가르쳐 얻을 바가 과연 무엇인가. 남북은 물론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도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냉전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려는 노력들을 다방면에 걸쳐 진행 중인 이때, 이런 시대착오적인 사업은 당장 중지되어야 하며, 이미 보급된 음반도 완전히 회수해야 한다. 이들 군가들은 사료로서 보존의 필요성은 있을지언정 보급하고 장려하여야 할 대상은 결코 아니다. 또 선정된 곡에 대해서도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가수 김도향이 다시 부른 ‘검은 베레모’(1973년 제작, 현재 특전부대가로 사용)를 듣고는 순간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특전부대 용사들/ 아아 검은 베레 무적의 사나이” 이 노래의 후렴구다. 바로 5·18 항쟁 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저항하던 시민군들을 제압한 후 늘어서서 의기양양하게 부르던 바로 그 노래다. 상상해 보라. 이 노래를 광주의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부르는 모습을. 현재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도 정부가 정식으로 인정한 국가 유공자다. 보훈처는 5·18 관련 국가 유공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일까. 이 밖에 한국전쟁 당시 불렸던 ‘전우야 잘 자라’, 베트남전 참전을 독려하고 정당화하고자 만들어진 노래인 ‘달려라 백마’, ‘맹호들은 간다’ 등이 주요 수록곡이다. 6·15 공동선언 이후 정부와 시민사회는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려 애쓰고 있으며, 베트남전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민관이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이벤트성 사업이라 할 이번 음반 제작에 대해서는 그 책임 소재를 밝히고 관련 부처의 엄중한 사과와 함께 보급된 음반을 모두 거둬들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언제까지 군 훈련소에서 10대 군가라고 하여 ‘멸공의 횃불’ 같은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답답한 심정을 토로해 보면서, 자발적인 나라사랑 겨레사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참신한 변화를 기대한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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