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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22 22:02 수정 : 2006.06.22 22:02

왜냐면―‘윤동주 <서시> 일본어 번역본 오류있다 ’를 읽고

가해자의 얼굴이 낯선 것은 그들이 언제나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일체의 반성이나 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여…

지난 17일치 <한겨레>에서 ‘윤동주 <서시> 일본어 번역본 오류 있다’라는 기사를 읽었다. 연세대 윤동주 기념사업회 일을 6년간 보아오면서 윤동주에 대한 여러 해석을 눈여겨보곤 하였다. 윤동주 시들을 항일 의도로 읽지 않고 빼어난 서정시로 읽으면 그가 더 보편적인 시인으로 자리잡지 않겠느냐 하는 논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모든 작가나 시인은 그가 태어난 시대에 포위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가해자 집단이 설치는 시대에 피해자였던 작가 의식을 어떻게 그 시대감각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가? 나는 그 의도가 옳지 않다고 읽는 쪽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모든 살아있는 것을 사랑해야지’로 바뀐 내역, 그야말로 숨겨진 두 차원의 슬픈 이야기를 윤동주 장조카 윤인석 교수로부터 전해 들었다. 이 착한 가족사는 내 마음을 슬픔에 젖게 한다. 일본인이 윤동주 시를 번역할 당시 그의 친동생인 윤일주 선생은 일본에 있었고 일본인 이부키 고는 자주 윤일주 선생을 찾아와 번역한 시들을 보여주면서 자문을 청하곤 하여, 이 시 ‘서시’에 대한 번역도 고민, 고민 끝에 그대로 용인한 모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봐라 바로 그 시인의 아우가 용인한 번역이니 틀림이 없지 않으냐? 이 번역에 왜 시비냐?’ 정도의 느긋한 배포가 이 번역자에게는 있다고 내겐 읽혔다. 내가 이 사실 이야기를 놓고 슬퍼하는 이유는 이렇다.

모든 가해자는 그가 행한 가해 사실을 숨기거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한다. ‘거 뭐 대단일 일이라고 자꾸 과거를 들추느냐? 앞으로 올 미래만이 더욱 중요하지 않으냐?’ 따위의 추악한 궤변이 우리 주변에는 횡행한다. 시인 이상이 ‘하루치씩만 잔뜩 산다’고 썼을 때 이 하루란 언제인가? 어제와 오늘, 담날, 모레, 이 시간개념은 따지고 보면 편의상 붙인 날짜일 뿐이다. 윤동주가 ‘내일은 없다’라는 시에서 썼듯 누구나 내일, 내일 하지만 실은 내일이란 없고 언제나 오늘만 있다. 이 오늘은 또한 놀랍게도 순식간에 어제, 그제, 과거로 바뀐다. 감추려는 가해자의 악행과 기억에서 영원히 지우지 않으려는 피해자의 선량한 다짐(경우에 따라 복수의 칼날을 갈 수도 있겠지!)은 인간 존재가 쥐고 있는 양날의 칼이자 슬픔이고 설움이다.

가해자의 얼굴이 낯선 것은 그들이 언제나 자기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일체의 반성이나 자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학기 말에 나는 중견작가 정찬의 두 작품 ‘슬픔의 노래’와 ‘완전한 영혼’ 그리고 이것을 <한국방송>에서 각색 방영한 ‘팩션 드라마-오월의 두 초상’ 강의로 끝을 마쳤다. 5·18 광주, 군부 독재자들이 탱크로 밀고 들어가 민간인들을 살해한 이 사건 당시, 한 피해자 장인하와 가해자인 계엄군 출신 박운형의 삶을 놓고 작가는 피를 흘리듯 정신의 기운을 모아 마무리짓고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슬픔의 강물로 흐른다는 이 소설적 가설은 가해자가 그 스스로 가해자였다는 자의식이 전제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가해자들은 결코 그런 자의식을 갖거나 그것을 슬픔으로 품어 안지 않는다. 그게 악의 본질이니까.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랑 또한 그 너비와 폭은 아예 다르다. 그것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여 한마디 적어 둔다. 악당은 언제나 악당일 뿐이고 천박한 것이다.

정현기/문학평론가·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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