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법무부는 2004년 4월, 공소 시효를 배제한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을 입법 예고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년이 지나도록 이 법안은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고 있다. 올해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26돌이 지났다. 1980년 5월, 전두환·노태우 등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광주에서 자행한 학살극으로 민주화 요구는 짓밟히고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보다 앞서 2차대전 중에는 최대 20만 명에 이르는 여성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갔고, 수많은 사람이 악명높은 일본 731부대의 생체실험으로 참혹하게 죽어갔다. 더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이러한 끔찍한 만행의 책임자들이 대체로 법과 정의의 심판을 피해갔다는 것이다. 5·18 학살의 주모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1년도 안 되어 국민 화합을 명분으로 사면되었다. 마찬가지로 꼭 60년 전인 1946년 5월, 일제 전범들을 심판하기 위해 열린 도쿄재판에서 ‘위안부’와 생체실험 등은 거론조차 되지 않았고, 731부대의 책임자였던 이시이 시로나 전쟁과 인권유린의 최고 책임자였던 일왕은 정치적 이유로 법적 책임을 면했다. 그럼에도 이들 재판의 역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5·18 재판을 통해, 무력 진압의 정당성이 부인되었고,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대통령도 법 아래 있다는 원칙이 확인되었다. 도쿄재판 또한 도조 히데키 등에게 법적 심판을 내림으로써 이들을 전범이라 규정하고 이들의 악행이 용납될 수 없는 범죄 행위였다고 국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렇듯 적법한 절차에 따른 재판의 사회적, 역사적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식한 나라들에서는 극악한 반인륜적 범죄자의 처벌을 통한 정의 구현에 힘써왔다. 특히,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전범들을 상대로 처음 원용된, 민간인들에 대한 집단 공격의 법적 심판 근거로 전시와 평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적용 가능한 공소시효 없는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가 각국에서 제정되었다. 전후 유럽에서는 나치 전범들에 대한 기소를 계속하고 있다. 독일은 나치 수용소 간수들을 ‘인도에 반한 죄’로 처벌하였고, 프랑스에서는 친나치 비시 정권 아래서 유대인 1500여 명의 강제수용소행을 명하고서도 전후 레지스탕스 행세를 하며 파리 경찰국장, 예산장관까지 지냈던 모리스 파퐁이 97년에 인도에 반한 죄로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유감스럽게도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아시아에서는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전쟁 직후의 재판들 이후로는 인도에 반한 죄의 국내법 도입이나 전범 소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위안부, 노동자 강제 징용 등에 관여한 한국인들이 분명히 있었지만, 이들을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심판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러한 책임 추궁 불감증 속에 5·18 학살과 같은 만행이 저질러진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2002년 국회의 동의를 얻어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을 비준하였다. 조약의 국내법 이행을 위해, 법무부는 국가인권위원회의 보완 의견을 반영하여 2004년 4월, 공소 시효를 명시적으로 배제한 인도에 반한 죄, 집단살해(제노사이드), 전쟁범죄를 규정한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을 입법 예고하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년이 지나도록 이 법안은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권력의 반인권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 시효를 두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러한 국가범죄 중 가장 중대한 것이 인도에 반한 죄인 만큼, 정부와 국회는 관련법 제정을 미룰 아무런 이유가 없다.위안부와 광주의 비극은 우리나라의 비극이기도 하였지만 전인류의 비극이기도 하였다. 우간다·콩고 내전에서 군인들의 성노예로 납치되는 현지 소녀들을 보면서 위안부 할머니를 떠올리고, 천안문·안디잔 학살에서 5·18 광주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 역사로부터 배운 것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과거 우리가 겪었던 고통을 지금 겪고 있지만 말을 못하는 이들을 대신해서 이들의 고통을 우리 입으로 얘기할 때가 왔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은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는 보편적 기준과 인식을 국내외에 정립·확산시켜야 한다. 그 시작은 바로 인도에 반한 죄를 처벌하는 법 제정이다. 신희석 /연세대 대학원생·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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