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5.08 17:43
수정 : 2006.05.08 17:43
왜냐면
모터쇼나 시상식에서 여성만이 장식품 내지 보조적인 구실을 하는것은 분명 남성이 사회의 주조를 이루던 시대의 인습이며 차별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는 여성으로서 사회를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아니, 없다고 느꼈다. ‘직장내 여성 차별’이나 ‘성매매’와 같은 화두는 아직 학교 밖 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나와는 괴리된 먼 나라 이아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난 뒤, 비로소 나의 ‘여성’이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서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차별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차별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거창하고 어렵게 페미니즘을 외치진 않는다. 다만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바꿔 볼 뿐이다. 소설 속 나라에서는 여성이 ‘움’으로, 남성이 ‘맨움’으로 표현된다. 움은 현실의 남성처럼 이른바 기득권을 가진 성이다. 곧 대부분 사회를 이끄는 직업이나 역할은 움에게만 진입을 허용한다. 그리고 맨움에게는 사회적 진입을 허용치 않으며 맨움 자신들조차 수동적으로 움을 보조하는 구실에만 머문다. 맨움은 이러한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그들은 점차 현실 속에서의 차별을 인지하고 불합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한다.
그 뒤였다.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크고 작은 차별들이 내 눈에 보인 건. 그리고 여성으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게 불편할 때가 많아졌다. 얼마 전 ‘부산 모터쇼’가 개막했다는 기사를 본 뒤에도 나는 불편했다. 기사 위쪽에 ‘젊고 예쁜 여성’들이 차 옆에서 뇌쇄적인 모습으로 서 있는 사진을 보았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우리나라에 자동차 1가구 1대 보유시대가 시작된다고 한다. 자동차가 만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남성 소비자만을 끌려는 듯 여성 모델이 장식품인 양 차 옆에 서야 하는가 쉬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동차 옆에 여성 모델이 있어야만 새차를 효과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것도, 잠재적 소비자를 더 많은 실질적 소비자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시상식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전파를 타는 각종 유명 시상식에서 시상자를 위해 트로피와 꽃다발을 ‘들어주는’ 사람 중 남성의 존재는 없다. 단아하게 차린 여성이 시상식을 ‘보조’해 주는 모습을 볼 때면 불편해진다. 왜 한번의 예외도 없이 이 모든 일은 여성에게만 주어진 ‘금남의 벽’이 됐을까. 별 것 아닌 일 가지고 유난 떤다고 말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런 작은 일 하나하나가 모이면 결국 근본적인 여권신장이란 없을 거란 생각이다. 이처럼 모터쇼나 시상식에서 여성만이 장식품 내지 보조적인 구실을 하는 것은 분명 남성이 사회의 주조를 이루던 시대의 인습이며 차별이다. ‘그런 일은 꼭 여성이 해야 한다’는 어떠한 논리적 이유도 당위성도 없다.
최근 대한민국 역사상 첫 여성총리가 탄생했다. 분명 여성이 사회 진출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며 ‘안사람’으로만 머물던 과거에 견줘 현재는 진일보한 시대다. 하지만 양성평등을 외치는 지금 시대에서 금녀의 벽이니 금남의 벽이니 하는 무대가 존재한다는 건 모순이다. 부디 앞으로는 모터쇼나 시상식을 보며 불편한 기분이 드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송유나/경기 안양시 동안구 호계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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