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한겨레〉 4월20일치 ‘저공비행’을 읽고
의견의 ‘다름’쯤으로 이해하고 싶지만, 표현의 저급함이나 언어의 부적절한 선택,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내용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지난 20일치 〈한겨레〉 31면에 ‘‘스승의 노래’는 환상, 존경심 없는 게 학생 탓이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그 글을 읽고 교육자로서 참담함과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글을 쓴 ‘듀나’는 스승의 날 자체를 없애고, ‘스승’이라는 말과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부르는 걸 금지하는 등 ‘스승의 은혜’에 대한 판타지만 제거해도 교권 회복의 반은 해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듀나의 주장이 의견의 ‘다름’쯤으로 이해하고 싶지만, 표현의 저급함이나 언어의 부적절한 선택,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스승 공포담’과 같은 무협적인 내용에 대해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특히 부적절한 글이 언론에 게재되어 교단에서 교육적 열정을 다하고 있는 대다수의 교원들을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것에 대해서는 교육자로서 자괴감마저 든다. 스승의 날은 1958년에 충남 강경지역의 학생들이 ‘병중에 계신 선생님이나 퇴직하신 은사들을 위문하는 활동’을 한 데서 시작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어떤 경우도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 사이에는 신뢰와 감사와 존경이 함께할 때 그 효과가 고양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러기에 스승의 날은 교원들 스스로 ‘존경’받고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 존경 풍토와 교육에 대한 관심을 높여 ‘좋은 교육, 좋은 선생님’을 실천하고자 있는 것이다. 교육계에는 예전의 한 교육부 장관이 “나에게는 선생이 없었다”고 교육자들을 폄훼했다는 ‘괴담’이 있다. 그런데 필자는 듀나라는 기고자가 학창 시절의 ‘괴담’이란 것을 유일한 논거로 제시하며 스승이라는 단어와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야말로 대한민국 ‘스승 공포담’과 교권 추락의 진짜 원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교원 모독 괴담’이 아닌가 한다. 듀나라는 기고자는 “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을 “기초적인 지식과 실력을 갖추고 있고 자기들을 성추행하거나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멋대로 구타하거나 엄마, 아빠한테서 뇌물을 뜯어먹지만 않아도 아이들은 고마워할 것”이라고 제시한 뒤, “세상엔 이런 기준도 넘어서지 못하는 교사들은 넘쳐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슨 근거로 세상에 이런 기준도 넘지 못하는 교사가 넘쳐난다고 주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런 근거 없는 주장이야말로 대다수 교사들을 모독하는 것이고, ‘교사’이기 이전에 자연인에 대한 존엄성을 파괴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 땅의 교사 대부분이 정말 “스승이라는 딱지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인터넷판에 실린 원문은 ‘인간 쓰레기들’로 표현)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글쓰기의 기본도 갖추지 못하고 표현의 자유도 잘못 이해한 탓으로 생각되지만, 필자는 듀나라는 분에게 올 스승의 날에는 회초리라도 준비해서 생각나는 선생님을 찾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그동안 스승의 날이 본래 뜻을 살리지 못하고 담임교사에게 선물 주는 날로 변질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기에 교총과 교장회가 중심이 되어 오랜 고심 끝에 은사에 대한 존경의 의미는 살리되, 스승의 날의 본래 뜻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스승의 날 기념식도 정부와 교원단체가 따로 해오던 것을 올해부터 정부, 학부모단체, 교원단체가 함께 하는 등 교육계에도 새로운 변화 기운이 일고 있다. 나아가 교직윤리헌장을 선포하고 잘못된 관행적 사례도 자정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올해만큼은 스승의 날을 전후하여 이번 일과 같은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믿음과 감사와 존중이 넘치는 교육 현장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해 본다.이원희/서울 잠실고 교사·한국교총 수석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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