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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13 18:30 수정 : 2006.03.13 20:55

왜냐면

그들한테는 생동감이 넘친다. 낯섦에서 오는 어리숙함이 멋있다. 이런 새내기들에게 체육 관련 학과의 통과의례는 전근대적이고 꽉 막힌 구조다.

어느 대학 강사 시절의 3월. 체육관에 들어서면 당황스러운 일을 경험한다. 새내기로 보이는 학생들은 여지없이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한다. 내 수업에 1학년 학생은 없는데 어떻게 나를 알고 인사를 할까, 혹시 다른 사람을 보고 인사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주위를 살펴보아도 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 예의가 바르구나”라고 생각했다. 대학 입학 뒤 치르는 이른바 ‘오리엔테이션’ ‘신입생 대면식’ ‘신고식’ 뒤에 나타나는 풍경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이런 통과의례는 4년간 학교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오리엔테이션이 아니다. 또한 직장에서 신입사원과 선배사원의 첫 만남과 같은 단순한 대면식도 아니다. 이는 신병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고 상관에게 신고하는 의례와 비슷하다. 지금의 병영이야 많이 달라졌다지만, 신고를 잘못하면 그에 상응하는 다양한 체벌이 가해지는 그런 것과 유사하다.

체육 관련 학과에서 이루어지는 통과의례에는 강압적 분위기, 폭력적인 언행, 심지어 일부에선 구타까지 동반한다. 21세기 대학에서 상상하기 힘든 비(반)인권적이고 비(반)교육적인 통과의례다. 영화 <실미도>에서나 나오는 장면을 ‘지금’ ‘이 시대’에도 목격하게 된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왜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통과의례를 치르는가. 말 그대로 관행적으로 이루어진다. 학과의 정체성을 알리는 데 이런 방식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체육 관련 학과의 정체성을 명령과 지시, 폭언, 군대 이상의 확고한 위계질서로 포장시키고 내면화시켜야 하는가? 또 그럴 권리가 있는가?

신입생, 그들한테는 생동감이 넘친다. 낯섦에서 오는 어리숙함이 멋있다. 억압된 입시교육에서 벗어나 자유를 머금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기대로 가슴이 콩닥콩닥한다. 이런 새내기들에게 체육 관련 학과의 통과의례는 날벼락이다. 전근대적이고 꽉 막힌 구조다. 공동체 정신을 위해 군대 유격과 비슷한 훈련으로, 때로는 오리걸음이나 머리박기 기합이나 협박으로 이뤄낸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

“왜 체육 관련 학과에만 화살을 돌리느냐”라는 불만을 터뜨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체육계는 마치 ‘치외법권 지대’인 양 유독 폭력에 대해서는 관대함을 유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사회가 민주화되고, 개인의 인권과 투명성이 중요하게 대두되면서, 체육계에서도 맞는 걸 참아가면서 운동하는 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체육인들은 스포츠의 위상에 걸맞은 자기반성과 책임감, 모범의식이 필요하다.

선배와 후배의 관계는 절대로 체벌로 끈끈해질 수 없다. 선진과 후진의 교육적 관계는 서로의 마음에 스며드는 데 있다. 체육은 위계질서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누구에게나 녹아드는 것이다. 이제는 체육계 내부의 자정능력 강화와 함께 양심선언을 할 때가 왔다. 장차 다른 사람에게 체육의 즐거움을 알릴 체육 전도사가 될 이들에게 체육계가 행여 구타공동체로 비친다면 현실은 암울할 뿐이다. 이제 체육계는 ‘교육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체육과 신입생은 다가올 체육문화의 거울이다.

류태호/고려대 교수·체육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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