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3.07 00:08
수정 : 2006.03.07 00:10
왜냐면
태극기를 흔들고 정열적 응원’을 하는 것이 일본 식민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의 역사적 정서와 동일시되면서 ‘애국적 행동’과 혼돈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2006년 공중파 방송의 첫 뉴스는 독일 월드컵 축구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축구가 현재 우리 사회의 큰 이슈이며 국민의 희망 중 하나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래서인지 한 이동통신사의 광고를 보면 결연한 쉰 목소리로 ‘우리는 또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고 외친다. 마치 독립을 위해 싸우던 애국투사들의 목숨을 내건 운동의 느낌을 자아내거나, 억압과 독재세력에 맞서 몸을 바쳐 민주주의를 외치던 시대를 회상하도록 만든다. 다른 이동통신사의 광고도 애국가를 록 음악으로 바꾸어 흥겹지만 절절히 애국심에 호소하듯 응원가를 부른다. 축구 응원이 마치 현대판 애국행동으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프랭클린 포어는 그의 책에서 축구는 민족, 정치, 종교, 사회 이슈를 이끌며 세계 각국에서 지배적인 스포츠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도 2002년 월드컵 축구 4강의 감동은 많은 변화를 주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16강, 8강, 더구나 4강까지 올라간 성적은 우리에게 신나는 스포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적 자부심을 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또한 놀랄 만한 서울시청 앞과 광화문의 응원 인파와 응원 문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 행사가 되었다.
하지만 치우침이 나타난 광적인 현상은 우리 사회를 흥분의 상태로 몰아넣으며 비이성적 비약의 결과를 낳는다. 거리에서 응원을 하며 ‘태극기를 흔들고 정열적 응원’을 하는 것이 일본 식민 상황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의 역사적 정서와 동일시되면서 ‘애국적 행동’과 혼돈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본질을 왜곡하거나 비약하는 것은 늘 문제를 야기한다. 현실의 문제를 망각시키거나 극단적 애국과 국수주의를 반영하여 사회의 건전한 이성을 마비시킨다.
애국자가 축구 응원을 할 수는 있어도 응원을 열심히 한다고 애국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애국하는 것이 고고하거나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응원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것이다. 축구를 축구 그 자체로 보자. 축구 응원을 따분한 일상에 활기와 흥분을 주는 여가활동으로 보자. 그것으로도 충분히 구실을 하는 것이다. 공식 응원단체를 끌어들이기 위해 과잉경쟁을 하고 응원을 비장한 애국행동으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 사회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축구가 바로 가기 위해서도, 그리고 훌리건과 같은 소아병적인 현상을 자아내지 않기 위해서도, 또한 다른 스포츠의 다양성과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과도한 경향에 치우치는 응원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참다운 애국과 민족적 행동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기 위해서도 착각은 금물이다.
이훈/한양대 관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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