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지금 이 순간,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소망한다. 오죽했으면 죽음을 생각할까. 삶이 시리고 외롭다는 것은 그래도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 아닌가. 두 줄기 철길만 바라보며 20년을 달려왔다. 경부선으로 호남선으로 지하철로, 철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 왔다.석탄가루 같은 밤을 삼키며 달려오면서 한 번도 기관사란 직업에 대해 후회해 본적이 없었다.박봉이지만 알뜰히 쪼개어 우리 다섯 식구 행복한 가정 꾸려오면서 지금까지 안전운행의 소임을 다해 왔다고 자부하고 싶다.간간히 동료들의 사상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퇴직하는 그날 까지 쭉 뻗은 철길처럼 무탈한 철길의 여정이 되길,나에게는 그러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당해 보지 않고는 누구도 모른다”는 동료들의 말 또한 무덤덤하게 흘러 넘겼다. 그러나 지금의 심정은 참담하다. 20년 무사고 운행의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2006년 새해 들어 나에게도 찾아 왔다.그것도 5일 간격으로 연속적으로 두 번씩이나 같은 시간대에 같은 참상으로 일어났다. “2006년 1월 3일 10시 03분경, 대화행 제 3138열차 -삼송역 진입 중 80대 남자 홈 중간에서 투신-현장사망”이것이 최근 내가 겪은 1차 사상사고의 전말이다.불가항력적인 제동거리 때문에 눈 뜨고 부딪혀야하는 참담함,긴박한 순간에도 끝까지 냉정을 유지하고 사고수습의 책무를 다해야 함에도 사지가 떨리며 목이 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사무소로 돌아와 사고 보고서를 작성하고“신년 액땜 한 것”으로 생각하라는 동료들의 위로와 술 한 잔으로 손을 씻으며(기관사들이 사상사고 났을 때 치루는 일종의 의식행위)무거운 발걸음으로 귀가했다.팔순을 넘겼으니“운이 다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하며..,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2006년 1월 8일 10시 19분경, 대화행 제 3118열차 -도곡역 진입 중 70대 남자 홈 시단에서 투신-현장사망” 닷새 전 사고 후유증으로 역에 진입 할 때 마다 누군가 뛰어 들 것만 같은 착시 현상에 한창 시달리던 날이었다.도곡역 진입 중,안전선 안쪽으로 언뜻 돌출 되는 사람을 발견했다.“설마 또...”하는 내 기대와는 상관없이 한 사람의 목숨이 또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나는 그때 이것은 꿈이라는 생각을 했다.그럴 수가 없었다.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예감이 적중했다는 생각에 이르자 스스로에게 소름이 끼쳤다.아마 “혼이 빠진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웅성거리는 승객들 틈에 가까스로 사령과 119에 급보,현장을 수습하고 다음 정거장을 향해 열차를 출발시켰다.어떤 상황에서도 열차는 달려야 하고 그것이 기관사의 숙명임으로... 을지로,종로3가를 통과하면서 가슴이 뛰고 손에 식은땀이 났다.모든 승객들이 한꺼번에 뛰어 내릴 것 같은 극심한 공한증 때문에 홈에 들어 갈 때 마다 비상제동 쪽으로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나는 지금 투신의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것일까. 3일의 위로휴가 동안 길고 긴 잠을 잤다.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심한 무기력증과 투신순간의 환영에 시달리면서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아내와 아이들의 눈길마저 죄스러워 피하고 싶었다.칠순을 넘긴 아버님의 기침소리마저 환청처럼 무섭게 들려왔다.지금 이 순간,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지만 또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할 것만 같아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10여 년 전 한 젊은 기관사의 죽음이 언뜻 떠오른다.입사하자 말자 처참한 사상 사고를 당하고 줄곧 실어증과 대인 기피증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휴직계를 내고 정신과 치료를 받던 중에, 그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아픈 기억이 스쳐간다.그때는 단순히 그의 심약한 기질적 특성 때문일 것이라는,막연한 추측을 했던 것 같다.그러나 지금 내가 당해 보니 결코 어느 한 개인의 성격문제로만 치부해 버릴 일이 아니다.사상사고 기관사의 사후 관리 문제가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시대이건 자살은 있어 왔고 자살도 일단의 그 시대 사회상의 반영일 테지만 유독 지금은“자살 전성시대"를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투신자살이 유행처럼 만연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언뜻 떠오르는 것이 인명 경시풍조,노인들의 소외감,빈부의 양극화...,이러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그 중에서도 인명경시 풍조가 더 큰 문제다. 자살이 부끄럽지 않는 세상인 것 같다.재벌 총수가 뛰어 내리고 사회 저명인사가 목매다는 세상이다.신이 준 하나 뿐인 생명이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살아 있을 때 보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걸어온 생의 여정을 정리 하면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느 이른 아침 조용히 눈을 감는 죽음은 아름답다. 사람들은 톨스토이의 소설<안나 까레리나>에서 주인공이 철길에 투신하는 장면을 감동적이라고 한다.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들의 모방 자살이 염려되는 대목이다.철길 위의 투신자살이 과연 그렇게 아름다운가. 아니다.처참한 몰골,몸서리치는 주검만 있을 뿐이다.거기엔 찢어진 살점만 난무할 뿐 이미 인간의 존엄성은 없다. 접근의 용이성과 높은 자살성공률(?) 때문에 지하철이 투신장소로 자주 이용된다고 한다.접근의 용이성으로 생각해 볼 때 자살이 우발적일 확률이 높고 이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현재 당국에서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스크린 도어 등의 안전시설을 확충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그러나 죽기를 작정하고 뛰어 드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이 문제 또한 근본적인 대책은 될 수 없다. “당신의 자살이 또 다른 자살을 부른다”는 준엄한 사회적 경고가 필요한 시기라고 본다.자살이 죄악시 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국가적,범국민적 가치관 정립이 무엇 보다가 시급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소망한다.오죽 했으면 죽음을 선택 했을까. 당신이 어두운 곳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웅크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따뜻한 손 한 번 내밀어 주지 못했음을 죄송하게 생각한다.그러나 한 번만 다시 하늘을 바라보자.새가 있고 꽃이 있고 이웃들이 살아가는 이 지상이라는 정거장에 함께 오래도록 머물러 주기를 소망한다.한 번 떠나가면 이 정거장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지만,한 번 참으면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삶이 시리고 외롭다는 것은 그래도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살아 있다는 자체가 축복 아닌가. 다시 나는 철길을 달려야 할 것이다.한 동안은 곡예운행을 하며 떨리는 마음을 추스려야 할 것이다.기둥 뒤에 얼비치는 죽음의 그림자를 매 순간 직감하며 식은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한 순간도 멈출 수 없는 것이 기관사의 길이기에,그러나 내 심장은 강철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비록 형사적 문책이 없다고 한들,그 두 분의 죽음에서 나는 양심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어쩌면 사고 순간의 환영을 평생을 지고 살아갈지도 모른다.그것이 기관사의 숙명이고 비애이다. 다시 소망한다.자살 없는 세상,자살 없는 철길을 달리고 싶다.언제나 행복만을 실어 나르는 든든한 시민의 발로 두 가닥 철길을 완주하고 싶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는 말이 있다.눈물을 쓰윽 닦고 다시 한 번 옹골차게 살아가길 소망한다. 또 소망한다. 삼가 두 분의 명복을 빈다. 김만년/한국철도공사 일산승무사무소 기관사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