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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16 17:01 수정 : 2019.04.16 20:28

1989년 4월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 톈안먼 광장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이 정치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5일 가족·친지 묘역에서 조촐한 추모행사
민주화시위 미온 대처 이유로 87년 실각, 2년 뒤 사망
혁명 1세대로 덩샤오핑이 차기 지도자 낙점
“경제-정치개혁 같이 가야 중국 특색 사회주의”
30돌 맞는 톈안먼 광장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불법’

1989년 4월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사망 소식이 알려진 뒤 톈안먼 광장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이 정치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중국 정치개혁의 상징으로 1989년 6월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촉발시킨 후야오방 전 공산당 총서기의 30주기 추모행사가 15일 조촐하게 열렸다. 4년 전 복권이 이뤄졌는데도 당이나 국가 차원의 추모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16일 “장시성 궁칭청에 조성된 후야오방의 묘역에서 전날 가족과 친지, 지지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행사가 열렸다”고 전했다. 행사에 참석한 양퇀 중국 사회과학원 사회정책연구중심 고문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서비스(SBS)에 사진과 함께 “짧고, 단촐하고, 엄숙하고, 애통한 분위기 속에 행사가 치러졌다”고 적었다. 그는 “행사가 끝난 뒤에도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당국이 행사를 가로막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1915년 11월 후난성 류양의 가난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난 후야오방은 14살에 일찌감치 공산당 운동에 가담한 혁명 1세대다. 그는 1930년대 대장정 시기 참모로 덩사오핑과 인연을 맺은 뒤, 문화대혁명(1966~1976년) 기간에 나란히 두차례 숙청을 견뎌내는 등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숨진 뒤 덩샤오핑이 권좌에 복귀하자 그의 최측근이던 후야오방은 숙청됐던 수많은 당 간부의 복권을 주도했다. 이 가운데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부친이자 혁명 원로인 시중쉰도 포함됐다. 그는 후야오방과 함께 1980년대 개혁·개방 초기 경제특구 건설 등을 주도했다.

덩샤오핑은 개혁파의 기수였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각각 총서기와 총리로 차세대 지도부를 구상했다. 후야오방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면, 경제건설과 함께 정치체제도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1986년 불거진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적극 대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87년 1월 실각했다. 당시 열린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이를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 시중쉰이었다.

총서기에서 물러난 뒤에도 후야오방은 당 중앙정치국원 자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1989년 4월8일 후임인 자오쯔양이 주재한 정치국 회의 참석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1주일 뒤 숨졌다. 각지에서 몰려든 추모행렬이 줄을 이었고, 베이징대학 구내에는 ‘죽어야 할 자는 안죽고,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그 직후인 4월22일 톈안먼 광장에서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열렸다. 행사장 진입을 차단당한 학생들은 광장 점거 시위에 나섰다. 시위가 장기간 이어지며 5월20일 계엄령이 선포됐다. 자오쯔양 역시 학생 시위에 미온적 대응을 했다는 이유로 실각했다. 6월3일 톈안먼 광장에 진입한 계엄군은 이튿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이후 ‘6월4일’은 중국에서 금기어가 됐다. 자오쯔양은 가택연금 중이던 2005년 11월 숨졌다.

후야오방의 개혁 노선은 절반만 현실화됐다.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지만, 그에 걸맞는 정치 개혁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현대 중국 정치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4세대 지도부였던 후진타오 전 주석과 원자바오 전 총리가 후야오방이 발탁해 키운 인물들이다. 후 전 주석은 퇴임 뒤 후야오방의 생가를 찾기도 했다.

4년 전인 2015년 11월2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후야오방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시진핑 국가주석 등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전원이 참석했다. 시 주석은 “후야오방 동지는 한평생 당과 인민을 위해 헌신했다”고 말했다. 후야오방에 대한 공식 복권이 이뤄진 셈이다.

중국 당국은 두달 뒤로 다가온 톈안먼 광장 민주화 운동 30주년을 의식한 탓인지 사망 30주기 추모행사를 열지 않았다. 중국에서 톈안먼 광장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불법 폭동’으로 규정돼 있다.

베이징/정인환 특파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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