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10.08 20:20 수정 : 2018.10.08 20:56

【짬】 올 막사이사이상 수상 유크 창 소장

유크 창 캄보디아 기록센터 소장. 허호준 기자

“역사를 망각하면 우리 스스로 범죄를 짓는 것이죠. 캄보디아 제노사이드(대량학살)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의무입니다.”

캄보디아 기록센터 소장 유크 창(57)의 말이다. 그는 지난 4~6일 제주4·3연구소와 4·3 70주년기념사업위원회가 주관해 제주에서 열린 ‘제주4·3, 진실과 정의’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기조강연을 했다. 지난달엔 1975~1979년 크메르루주 정권이 저지른 제노사이드 진상규명과 교육에 헌신해 온 공로로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받았다.

크메르루주 정권이 저지른 학살로 캄보디아 인구의 약 4분의 1인 220여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킬링필드’란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다. 창 소장의 친인척 60명도 희생됐다. 12명이던 가족은 학살 뒤 4명만 남았다. 아버지가 수도 프놈펜에서 보석가게를 운영했던 중산층 집안에서 자란 창 소장은 1975년 4월 크메르루주 군이 진주할 당시 집에서 쫓겨났다. “강제수용소에서 노예처럼 일했고 죽음이 일상이었죠.” 당시 임신 상태의 굶주리는 누나를 위해 수초와 버섯을 채취하다 크메르루주 병사에게 붙잡혀 마을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여러 시간 동안 고문을 당하기도 했단다. “병사들은 어머니 앞에서 나를 고문했고, 어머니는 너무 무서워서 울지도 못했죠. 우는 것도 범죄였거든요.” 병사들은 그의 누나가 쌀을 훔쳤는지 확인하기 위해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했단다.

크메르루주 공포통치가 끝나자 베트남군이 1979년 들어왔다. 캄보디아인들은 이를 크메르루주로부터의 해방으로 보기도 했고, 베트남의 침략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캄보디아가 혼란상태에 빠지자 그를 타이 국경지대에 있는 난민수용소로 보냈다. 당시 18살이던 그는 수용소에서 난민 신분으로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교육을 받았지만 제노사이드가 늘 나를 따라다녔어요. 제노사이드의 역사 망각은 범죄란 생각이 들어 캄보디아로 돌아왔어요.”

1992~1993년 유엔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 소속으로 유엔 감시 하의 선거 지원을 위해 귀국했단다. “캄보디아가 평화와 화해의 기회로 삼아 앞으로 전진하기를 원했지만, 당시 크메르루주의 공격 표적이 돼 밀림 지역에서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그뒤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예일대의 캄보디아 제노사이드 조사를 위한 프로젝트 책임자가 돼 1995년 캄보디아 기록센터를 설립했다.

크메르루주 학살 진상규명 공로
“학살 뒤 가족 12명 중 4명 남아”
18살 때 난민 신분으로 미국 가
예일대 진상조사 프로젝트 책임자로
23년 전 캄보디아 기록센터 만들어

‘제주 4·3’ 학술대회서 기조강연

“어머니는 고국이 여전히 혼란상태라며 아들의 귀국을 원치 않았어요. 그러나 이번에는 용서가 아닌 가해자 기소를 위해 돌아왔어요. 제 입장도 화해에서 정의로 바뀌었어요. 사람들은 화해와 평화를 또 앞으로 전진하기를 원했지만, 정의가 바로 서지 않는 한 화해는 불가능합니다.”

기록센터는 제노사이드와 관련해 지금껏 생존자와 가해자 구술채록을 비롯해 심문조서, 선전활동, 잡지, 영화, 일기 등 100만 건 이상의 자료를 수집했다. 2만 곳 이상의 대규모 집단학살지와 100곳에 이르는 희생자나 지역 차원에서 만든 추모시설 등도 찾아냈다. 캄보디아전범재판소에 자료 제공과 함께 직접 증언대에도 서 가해자 단죄에 기여했다.

그는 ‘선 진실추구 후 화해’를 강조했다.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면, 기소도 하지 않고 진실도 규명하지 않고 화해를 한다면, 그 화해를 누가 받아들이겠어요. 또 화해가 지속할 수 있겠어요?” 덧붙였다. “가해자들이 사과하지 않으면 비극적인 역사는 반복됩니다. 제노사이드 이후의 정의 추구는 국가를 다시 세우고 화해를 하고 앞으로 전진하기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 이런 말도 했다. “캄보디아 7~12학년 학생들은 크메르루주 시절의 제노사이드를 교육받고 있어요. 과거 극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교육입니다. 교육은 기억을 의미해요. 교육은 정의의 보충교재이며, 또 다른 방식의 가해자 기소나 다름없어요.”

그는 고대의 캄보디아 종교지도자들과 학자들이 역사를 기록했던 마른 나뭇잎이라는 뜻의 ‘슬레우크 리트’ 연구소 겸 기념관 건립에도 전념하고 있다. 이 연구소 소장도 겸하고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만든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이 기념관은 5천 만 달러 이상을 투자해 아시아 최대의 제노사이드 연구기관이자 기념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기념관은 기억과 연구, 치유와 화해, 교육의 무대가 될 겁니다. 희생자들의 증언, 증거 등 모든 것을 수집하고, 희생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 겁니다. 이는 정의 구현의 과정이고, 역사를 위한 것이죠. 전 세계에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알리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