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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09 11:43 수정 : 2018.06.09 11:55

버마의 샨주에 자리 잡은 샨주남부군 본부 로이따이렝의 신병훈련소. 정문태 제공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18) 타이-버마 국경 로이따이렝산

버마의 샨주에 자리 잡은 샨주남부군 본부 로이따이렝의 신병훈련소. 정문태 제공

“떨어뜨리는 한 방울 피는 역사의 한 줄/ 떨어뜨리는 여러 방울 피는 역사의 여러 줄/ 조국 샨(Shan) 해방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 않는다/ 적을 깨트리고, 조국을 지키는 용감한 전사들이여/ 깃발을 높이 올려라/ 우리는 영원히 칼을 들 것이다.”

신병 250여명 우렁찬 군가와 함께 로이따이렝 산악에 새벽이 꿈틀댄다. ‘샨의 빛나는 산’이란 뜻을 지닌 로이따이렝이 아직은 아침 햇살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짙은 안개를 몰고 와 신병훈련소를 휘감아 덮는다. 버마 정부에 맞서 61년째 접어든 샨주 해방투쟁의 아침이 쉽사리 열릴 것 같지 않다.

사령관 따라 들어간 해방구

해발 1400m 로이따이렝산, 타이와 국경을 맞댄 여기는 버마 샨주 해방을 외쳐온 샨주복구회의(RCSS)와 그 무장조직 샨주남부군(SSA-S)이 본부를 차린 곳이다. 세 겹으로 이어지는 샨주의 엄청난 산세에 기가 질린다. 첫 겹은 타이와 국경을 가르는 로이따이렝산이고, 그 다음 2㎞쯤 앞 산봉우리를 넘어 둘째 겹은 세계 최대 마약군벌로 꼽는 와주연합군(UWSA) 진지고, 그 너머 25㎞쯤 떨어진 마지막 셋째 겹은 버마 정부군 점령지다. 말하자면 로이따이렝은 남쪽으로 타이 정부군과 북쪽으로 와주연합군에다 버마 정부군에 겹겹이 둘러싸인 전선이다.

샨주 산악지대. 앞쪽 산이 샨주남부군 본부가 자리 잡은 로이따이렝이고, 가운데 산이 세계최대 마약군벌 연합와주군 진지고, 가장 뒤쪽 푸른색으로 보이는 산이 버마 정부군 점령지다. 정문태 제공

6월5일 아침, 타이 북부 치엥마이에서 소수민족해방군 회의에 참석하고 되돌아가는 샨주복구회의 의장이자 샨주남부군 사령관인 욧석 장군 동행 취재 길에 오른다. 꼬부랑고개 길로 악명 높은 지방도 1095를 따라 동북쪽 빠이를 거쳐 지방도 1226으로 갈아타고 반빵마파에 닿는다. 치엥마이에서 195㎞, 여기까지는 관광객이 드나든다. 그 다음 타이 최북단 마을 반빵깜까지 14㎞는 무인지대다. 이 길에서만 4차례나 타이군 검문소를 만난다. 타이 군인들은 욧석 자동차를 보자마자 경례를 올린다. 검문도 검색도 없는 통과다. 내가 탄 2호차도 같은 대접을 받는다. 타이군이 욧석의 샨주남부군를 몰래 도우며 버마 정부군을 견제해온 사실은 알음알이 알려져 왔지만 현장을 본 건 처음이다. 반빵깜에서 비포장 산길 4㎞를 올라 로이따이렝산 봉우리 가운데 한 꼭대기에 선다. 마지막 타이 국경 검문소가 자리 잡았다. 이 검문소가 로이따이렝산 꼭대기를 남북으로 갈라 타이와 버마의 샨주 국경을 나눈다.

타이·버마 정부군과 마약군벌에
둘러싸인 샨주해방무장조직 본부
로이따이렝산으로 사령관과 동행
욧석이 개척한 인구 4천의 해방구

마을과 병영이 어우러진 땅에서
800여명의 학생에게 무상교육
5개 해방구 관리하며 의료지원
정부도 못한 대민사업 ‘난공불락’

로이따이렝은 여느 소수민족해방군 본부와 달리 마을과 병영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1996년 욧석이 샨주남부군를 이끌고 와서 이름 없던 이 산에 로이따이렝을 붙였으니 22년 먹은 해방구다. 곳곳에 샨주군 병영과 군사시설이 자리 잡았고 그 사이사이에 4개 마을 4천여 주민이 삶터를 다졌다. 이 깊은 산골 전선마을에 전기가 돌고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넘친다. 군사시설이나 가로등 머리엔 어김없이 태양광 패널이 붙었다. “물은 이 산 중턱에서 끌어올려 집집마다 공급해왔다. 전기는 아직 병영, 학교, 병원 같은 특수시설 가까이만 누리는데, 머잖아 마을로도 보낼 계획이다.” 욧석 비서 짜이 홍캄 말이다.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순 없지만, 마을을 둘러보면 말치레가 아닌 것만큼은 틀림없다. 로이따이렝민족학교를 그 증거로 내놓을만하다. 초등학생 500명, 중학생 250명, 고등학생 50명, 모두 800명 아이들한테 무상교육을 실현했다. 병원은 좀 더 또렷한 증거다. 외국인 자원봉사 의사 3명에다 간호사 25명이 뛰어다니는 로이따이렝 병원은 환상적이다. 시설이 아니라 의료교육과 지원사업이 그렇다는 말이다. 해마다 6개월 과정을 두 차례 돌려 50여명 의료요원을 키워내 샨주남부군 전선뿐 아니라 해방구 5개 지역에 파견해왔다. 해방구에는 5개 병원과 19개 간이의료센터가 돌아간다. 백팩을 맨 이동의료팀은 산골마을을 돌아다닌다.

처음 보는 혁명조직 ‘자립 현장’

그동안 숱한 혁명조직들 해방구를 취재해 왔지만 이만한 자립도를 지닌 대민사업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이런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체계는 버마 정부도 못해낸 일들이다. 샨주남부군 취재를 와서는 마을에 꽂히고 말았지만, 그래도 여기가 전선은 전선이다. 6개월마다 250명씩 쏟아내는 신병훈련소가 날마다 돌아가고, 하사관을 소위로 길러내는 3개월짜리 장교학교에는 까렌민족해방군(KNLA)과 까레니군(KA)에서 보낸 교육생까지 포함한 250명이 열기를 뿜어낸다. 이렇게 길러낸 샨주남부군 병력이 1만에 이른다.

로이따이렝산. 아래 쪽에 샨주남부군 본부가 자리 잡았고 위쪽은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다. 산꼭대기는 모두 샨주남부군 진지다. 정문태 제공

“군사력만이 샨주를 지킬 수 있다.” 욧석의 이 말은 해방구 로이따이렝이라는 산악왕국을 떠받치는 정신이고 영혼이고 법이다. 샨주 해방투쟁이 60년을 넘었다는 건, 버마 정부가 정규군 40만에다 온갖 화력을 동원하고도 지난 60년 동안 샨주를 쓸어 담지 못했다는 뜻이다. 정부군이 총을 거두고 평화를 향해 가야하는 까닭이다. 그게 소수민족 자결권과 자치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버마 연방이다.

내 눈에 비친 로이따이렝은 난공불락 요새다. 지형과 군사력이 다가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주민 4천에다 해방군 2세들이 자라고 있다. 해마다 그 숫자를 메워갈 아이들은 또 태어날 것이다. 이 땅에서 샨주 해방투쟁이란 건 이미 대물림해온 문화고 전통이고 삶이다.

로이따이렝 전선의 밤이 깊어간다. 벌레들조차 숨죽인 전선의 이 고요는 머잖아 닥칠 총성을 예감하는 불길한 신호다. 내 바람은 늘 하나였다. 이 전선일기가 마지막 장이기를.


장교교육과정 개회식에서 연설하는 욧석 장군(샨주복구회의 의장·샨주남부군 사령관). 정문태 제공

[인터뷰] “가족과 서울 구경 다녀온” 버마 반군 지도자 욧석 장군

“5년쯤 전 아내와 딸과 함께 서울 구경 다녀왔어.” 여태 산악전선을 누벼온 ‘반군’ 지도자한테 들은 말치고는 가장 ‘반란적’이었다. 반군 지도자들이 바깥세상으로 비밀스레 정치적 나들이를 해온 것과는 결이 다르다. “한국 가수나 배우들은 어떻게 태어나나?” 이쯤 되면 신세대 게릴라 지도자상이 나온 셈이다. 그이는 1959년 샨주 남부 몽냐웅에서 났으니 우리로 치면 올해 환갑이다. 80대 언저리가 주류인 버마 소수민족해방전선 지도자들 속에서 가장 어린 욧석 장군이 그렇다는 말이다. 1948년 버마 독립 뒤부터 소수민족해방전선을 이끌었던 1세대 지도자들은 모두 사라졌고, 이제 2세대 지도자들도 저물어 가는 판이다. 그이를 2.5세대쯤으로 부를만하다.

“한국 가수는 어떻게 태어나나?”

열일곱 되던 1976년 샨연합혁명군(SURA)에 뛰어든 욧석은 꼬박 42년을 전선에서 보냈다. 전선 50년이 기본이라는 버마 소수민족해방전선 전설급으로 들어설 날도 머잖았다. 그이가 밟아온 길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만큼 곱잖게 바라보는 눈길도 싹 가시진 않았다. 그이 팔자는 1985년과 1996년 두 해에 결판났다. ‘1985년’. 1950~1990년대 중반까지 ‘아편왕’ 별명을 달고 국제마약시장을 주물렀던 쿤사가 샨주 독립투쟁을 외치고 나섰다. 이어 쿤사의 샨연합군(SUA)과 샨연합혁명군의 한 갈래로 모헹이 이끈 따이혁명회의(TRC)가 뭉쳐 몽따이군(MTA)을 창설했다. 따이혁명회의에 몸 담았던 욧석 운명이 꼬였다. “조직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애초 나는 장사꾼인 쿤사를 안 믿었고 인정 안 했다.” 이미 얼룩져버렸다. 몽따이군이 샨주 독립투쟁보다 오히려 쿤사의 마약군사조직 노릇을 했으니. “아픈 데를 건드려 미안하다. 아무튼, 그 뒤로 샨주남부군도 몰래 아편 만진다는 의심 받아왔는데?” “우리가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와 함께 아편 뿌리 뽑겠다고 나선 걸 잘 알면서 그런 말을. 아편은 버마 군부한테 따져봐라. 그쪽 사업이잖아.”

‘1996년’. 욧석한테 1985년이 묻혀간 인생이라면 1996년은 오롯이 제 몫이다. 쿤사가 버마 군사정부에 투항하면서 2만 가까운 몽따이군도 모두 손을 들었다. 욧석은 투항을 거부한 옛 따이혁명회의 출신 300여 군사를 이끌고 샨주남부군를 만들었다. 이어 1999년 본부를 로이따이렝으로 옮긴 뒤 2000년 상위 정치조직인 샨주복구회의를 창설했다. 그로부터 욧석은 까렌민족해방군(KNLA)을 비롯한 소수민족해방군들과 손잡고 군사정부에 맞섰다. 여기가 샨 해방전사 욧석으로 환생한 지점이다.

욧석은 표정 없는 얼굴이고 잘 웃지도 않는다. 말도 쓸 만한 것만 골라서 한다. 한마디로 읽기 만만찮은 인물이다. 이번 취재에서 이틀 동안 같이 먹고 같이 다녔고, 또 인터뷰라고 따로 두어 시간 마주 앉았지만 늘 꼿꼿했다. 그 전에도 그랬다. 지금껏 나는 딱 두 대목에서 짧은 순간 맥 빠진 욧석을 보았다. ‘쿤사’와 ‘아편’을 입에 올렸을 때다. 목소리까지 낮추는 걸로 봐서 그이가 이 둘을 멍에로 안고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그 속내까지 후벼 파기는 너무 잔인한 것 같아 멈췄다. 내 직업적 권능은 여기까지다.

“몇 해 전 버마 망명 언론들이 ‘샨주남부군의 대민 징세와 강제 징병 포기 선언’을 보도한 적 있는데?” “우린 강제 징병 없다. 여긴 샨주복구회의 헌법을 따르는 독립해방구다. 남성 군복무 5년은 의무다.” “어기면?” “법과 사법위원회판단에 따라 처벌한다.” “국경지역 대민 징수는 어디든 해묵은 문젠데?” “주민들한테 왜 세금 뜯나. 우린 법에 따라 사업가들한테만 세금 걷는다.” 국경 소수민족해방전선에서 몇 안 되는 언론친화적 인물로 꼽을만한 욧석이지만 이 대목에서는 언론을 향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확인도 않고 기사 쓰는 당신들이 문제야. 여기 와 본 기자가 몇이라고, 웬 전문가들이 그렇게 많은지.”

먹구름 낀 버마의 앞날

샨주남부군는 2011년 테인세인 대통령 정부와 휴전협정을 맺은데 이어, 2015년 휴전협정에 서명한 8개(현재 10개) 소수민족해방군과 버마 정부 사이에 전국휴전협정(NCA)까지 맺었다. 그 다음 단계가 정치회담이고 그 다음이 연방으로 가는 길인데 지금껏 정치회담이 제자리걸음이다. “연방은커녕 죽기 전에 정치회담이나 보겠나?” “2~3년 안에는 힘들다. 빵롱협정으로 돌아가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다.” 빵롱협정은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앞둔 버마의 아웅산장군과 소수민족 샨, 친(Chin), 까친(Kachin)이 자결권과 자치권을 인정한 버마연방 창설 합의다. 이 협정은 10년 뒤 소수민족의 선택에 따른 연방 탈퇴 권리까지 담았다. “테인세인 준군사정부와 지금 아웅산수찌 정부, 어느 쪽이 편한가?” “불편한 건 둘 다 똑같다.” 짧은 욧석 한 마디에 어두운 버마 앞날이 밀려온다. 로이따이렝을 삼킬 것 같은 먹구름과 함께.

▶정문태 1990년부터 타이를 근거지로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전문기자.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 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 취재 기록> <현장은 역사다> <위험한 프레임>이 있다. 매주 우리가 몰랐던 국경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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