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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04 09:46 수정 : 2018.02.04 10:00

반힌땍 사람들은 쿤사가 이끈 샨연합군(SUA) 본부를 쿤사박물관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영웅을 기리고 있다. 왼쪽 깊숙이 자리 잡은 건물이 쿤사의 사무실이었다. 정문태 제공

[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④ ‘깨진 돌 마을’ 반힌땍

반힌땍 사람들은 쿤사가 이끈 샨연합군(SUA) 본부를 쿤사박물관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영웅을 기리고 있다. 왼쪽 깊숙이 자리 잡은 건물이 쿤사의 사무실이었다. 정문태 제공

『따앙민족해방군(TNLA) 전투상보 : 2017년 12월14일. 1725~1800시』 버마 정부군 제88사단 예하 제344보병대대, 만똔읍 만샤마을과 까이꼬르마을 사이 아군 주둔지 공격. 아군 제101대대 반격. 버마 정부군 전사자 3명, 아군 전상자 1명 발생. - 따앙민족해방군 정보부

『따앙민족해방군 전투상보 : 2017년 12월22일. 0945~1030시』 아군 제876대대, 버마 정부군 제324 경보병대대와 남뚜읍 호까이 마을 인근에서 교전. 버마 정부군, 교전 종료 뒤에도 1330시까지 120밀리미터 포로 무차별 포격. - 따앙민족해방군 정보부

버마 국경 산악을 바라보며 다니는 타이 북부 여행길이 즐겁지만은 않다. 하루가 멀다 않고 날아드는 따앙민족해방군 전투상보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벌써 3년째다. 아무 도움도 못 주는 한낱 외신기자한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텐데….

버마 샨주 북쪽에 해방구를 튼 따앙민족해방군은 소수민족 팔라웅(따앙)의 자치와 해방을 외치며 버마 정부군에 맞서온 팔라웅주해방전선(PSLF)의 무장조직으로 이른바 ‘비휴전그룹-7’ 가운데 하나다. 2016년, 아웅산수찌가 버마 인구 가운데 40%를 웃도는 소수민족들의 전폭 지원을 받아 정부를 꾸렸으나, 정작 정부군은 까친주와 샨주에서 여전히 소수민족들을 공격하고 있다. 버마 안팎에서 아웅산수찌를 거세게 몰아붙여왔지만 달라질 낌새는 안 보인다.

세상은 참 고르잖다. 산악 밀림에 보이지도 않는 추상적인 선을 그어 놓고 타이 쪽은 관광객들 웃음소리가 귀를 때리는데, 그 너머 버마 쪽은 전쟁판 비명이 끊이질 않으니. 이 근대국가 요물인 국경선 하나로 숱한 사람들 운명이 갈린 꼴이다. 그러니 이 몹쓸 국경선을 발치에 둔 반힌땍을 둘러보는 내내 심사가 복잡할 수밖에는. 더구나 이 동네는 버마 샨주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들끓는 곳이다 보니 더 그렇다.

지도와 도로 표시판엔 ‘반덧타이’로

‘깨진 돌 마을’이란 속뜻을 지닌 반힌땍은 타이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북동쪽 끄트머리, 마치 손가락으로 버마 샨주를 가리키는 듯한 곳에 자리잡았다. 그러고 보니 지도에도 도로 표시판에도 반힌땍이 아니라 반텃타이(‘명예로운 타이 마을’)로 나와 있다. 1982년 정부가 이름을 바꿨는데 사람들은 여태 반힌땍을 입에 달고 산다. 타이 사람들 가운데도 반텃타이를 아는 이가 드물다.

1903년 버마에서 내려온 소수민족 아카 사람들이 지은 마을 반힌땍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인종·다문화 마을로 바뀌었다. “4천 주민 가운에 아카가 40퍼센트쯤으로 아직은 다수지만 샨 사람, 윈난 사람에다 소수민족 라후, 리수, 야오가 한데 어울려 산다.” 아카 출신 읍장 떼이친(42) 말마따나 이제 반힌땍에서 아카 색깔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26년 전, 어디를 가나 마주치는 전통 옷을 걸친 아카 사람들과 말이라도 섞어보고 싶어 손짓 발짓했던 내 기억 속의 반힌땍은 다 흘러간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하기야 한길을 따라 현금지급기, 세븐 일레븐, 위성안테나, 무선 기지국, 송전탑, 테니스장이 줄줄이 이어지고 와이파이가 날아다니는 판에 전통 옷이라니? 지나친 낭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샨연합군의 연병장 자리에 서 있는 말 탄 쿤사 동상. 정문태 제공

타이 북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마을
버마 소수민족 아카 사람들의 터전
타이 정부가 ‘반덧타이’로 이름 바꿔
종교 뒤섞인 다인종·다문화 실험장

1970년대 ‘골든 트라이앵글’의 중심지
‘아편왕’ 쿤사가 샨연합군 본부 차려
공산세력 맞서는 댓가로 아편 사업
베트남전쟁 뒤 미국한테서 버림 받아

다인종·다문화는 인류의 꿈이다. 변화는 인류의 역사다. 국경 산골 반힌땍도 마땅히 그 꿈과 역사의 소중한 한 토막이다. 근데 아카색 대신 짙어진 반힌땍의 다인종·다문화 색깔과 그 변화를 보는 마음이 좀 편치가 않다. 어디든 국경 산골이 그렇듯이 반힌땍의 변화 한복판에도 온갖 신들이 버티고 있다. 이 골짜기에 교회, 성당, 모스크, 절이 곳곳에 널렸다. 절만 해도 타이, 버마(샨), 중국(윈난) 불교가 덩치를 뽐낸다. 국경 산골의 전통 문화를 떠올리며 반힌땍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얼핏 후회하기 딱 좋은 풍경이다. 이 신들의 경쟁을 놓고 타이 정부나 관광업계는 다인종과 다문화가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마을로 반힌땍을 선전해왔다. 지금껏 드러난 큰 말썽이 없었으니 아니라고 우길 것도 없지만, 종교를 다인종이니 다문화의 상징처럼 들이댄다면 숨 막혀 줄을 사람도 적잖을 듯싶다. 나처럼. 한데, 왜 신들은 하나같이 볼썽사나운 콘트리트 건물을 이렇게 좋아들 하는지! 이 아름다운 산골에 어울리는 나무교회, 진흙성당, 돌모스크, 갈대사원으로는 이문을 낼 수 없는 탓일까?

신과 전통문화가 함께 살기 힘든 까닭인지 뭔지 그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옛날과 달리 반힌땍은 왠지 맥 빠지고 메마른 느낌마저 든다. 타이 북부 산골마다 관광객이 넘쳐나는 12월인데도 반힌땍은 그저 고요하다. 한 해 기껏 1000명 쯤이 찾아든다니 오지인 건 틀림없다. 게다가 그나마 내세울만 했던 전통문화란 것도 다 사라져버린 데다, 삥 둘러친 산 말고는 마땅한 볼거리나 먹을거리도 별로 없으니 오죽하랴.

아직도 “아버지”나 “사령관”으로 불러

한참 말하다 보니 왜 이 맹맹한 산골을 찾아왔는지 맥을 놓쳐버렸다. 실제로 반힌땍은 찬찬히 뜯어보지 않으면 그저 심심한 두메산골일 뿐이다. 애초 누가 저작권을 지닌 말인지 몰라도 “아는 만큼 보인다”고들 하는데, 딱 어울리는 곳이 반힌땍이다. 역사를 한 꺼풀만 벗겨보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놀라운 동네다. 1970년대 중반 연간 1000톤 웃도는 아편을 생산한 버마-라오스-타이 국경을 낀 이른바 골든 트라이앵글의 중심이 반힌땍이었다. 그 마약 생산과 루트를 쥐고 있던 자가 ‘아편왕’으로 불리며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쿤사다. 그 쿤사가 이끌었던 샨연합군(SUA)이 본부를 차린 곳이 바로 반힌땍이었다.

“쿤사는 아주 따뜻한 사람이었다. 가난한 이들한테 돈도 나눠주고 병원과 학교도 지어주고….” 한 평생 농사를 지어온 기(70) 말처럼 쿤사는 아직도 반핵땍에서 만큼은 살아있다. 쿤사가 남긴 자취는 반힌땍을 굴려가는 심장 노릇을 해왔다. 오늘날 1000명 가까운 학생들이 공부하는 따통중학교도, 현대식 매파루앙병원 뿌리도, 마을마다 통하는 길도 모두 쿤사가 남겨 놓은 것들이다. 반힌땍 사람들은 그런 쿤사를 “아버지”니 “아저씨”니 “사령관”으로 불러 왔다. 세상이 뭐라 하던 반힌택 정서만큼은 오늘도 큰일을 한 은인으로 쿤사를 기억하고 있다.

“나이 많은 어른들 이야기 들어보면 그 시절 반힌땍에는 아편 그림자도 없었고, 오히려 쿤사는 마을 사람들이 아편에 손도 못 대게 아주 엄히 다스렸다고 한다.” 읍장 떼이친이 어른들 말을 빌려 쿤사를 위한 변명을 대신한 셈인데, 이게 반힌땍 사람들 믿음이기도 하다.

샨주연합군 본부 사무실에 있는 실물 크기의 쿤사 밀랍인형. 정문태 제공

중국계 아버지와 샨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쿤사는 장치푸(張奇夫)로도 잘 알려진 인물인데, 본디 샨주 로이마우에서 ‘까끄웨예’(KKY)를 이끌던 군벌이었다. 까끄웨예는 1962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버마의 네윈 장군이 샨주군(SSA)과 샨주연합혁명군(SURA) 같은 반군과 버마공산당(BCP)에 맞서고자 1963년 무장을 허락한 지역 방위대였다. 군사정부는 그 까끄웨예가 반군들에 맞서는 대가로 아편 밀수를 눈감아줬다. 그러나 까끄웨예는 방위보다 아편사업에만 매달렸고, 결국 군사정부는 1969년 쿤사를 감금한데 이어 1973년 까끄웨예를 불법집단으로 낙인찍었다.

쿤사는 부하들이 러시아 의사를 납치해 교환조건으로 내걸면서 1973년 풀려난 뒤, 아예 가족을 데리고 반힌땍으로 넘어왔다. 그게 1976년이었다. 이제 쿤사는 까끄웨예가 아닌 샨 독립을 외치는 샨연합군(SUA) 지도자로 타이-버마 국경 무대에 등장한다. 그로부터 반힌땍에 본부를 차린 쿤사는 2만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중국 인민해방군에 쫓겨 타이-버마 국경으로 흘러든 장제스의 국민당 잔당과 마약패권 전쟁을 벌이며 인도차이나 아편시장을 폭발적으로 키워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전만해도 연간 60톤에 지나지 않던 인도차이나 아편 생산량이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1000톤을 웃돌았다. 그 무렵 버마에서 생산한 아편 40%와 미국으로 흘러간 마약 70%가 쿤사 손을 거쳤다. 국제마약 시장 팽창에는 그 시절 국민당 잔당과 라오스의 몽족을 반공 용병으로 부리며 그 대가로 아편 생산과 운송을 지원한 미국 중앙정보국(CIA)도 한몫 단단히 했다.

쿤사의 샨주 독립 투쟁을 전시한 샨연합군 옛 병영. 어디에도 ‘아편왕’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정문태 제공

CIA, 쿤사를 공적 제1호로 지명수배

1975년 베트남전쟁 종전과 함께 미국 정부가 우려먹던 아편의 군사적 유효기간도 끝난다. 미국 중앙정보국과 마약단속국(DEA)은 쿤사를 공적 제1호로 지명수배했고 반힌땍도 고비를 맞게 된다. 1980년 타이 총리가 된 쁘렘 띤술라논 장군은 미국 정부 압박 끝에 마약 박멸 깃발을 올렸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쿤사 뒤를 받치며 이문을 챙겨왔던 타이군은 1982년 탱크와 전투기를 앞세워 샨연합군 본부가 자리잡은 반힌땍을 공격했다. 두메산골 소수민족 마을이었던 반힌땍은 그렇게 전쟁터가 되었다. 며칠 동안 거세게 저항하던 쿤사는 결국 버마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 그 뒤 쿤사는 타이 국경과 가까운 호몽에 새 본부와 헤로인 제조창을 만들어 1996년 버마 군사정부에 투항할 때까지 국제마약 시장을 주물렀다. 버마 군사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 압력 속에서도 쿤사를 끝내 기소하지 않은 채 여생을 보장했고, 쿤사는 2007년 10월26일 랭군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갔다.

반힌땍 사람들은 그해 11월7일 쿤사 추모식을 치르며 슬픔을 달랬다. 그리고 시장통 뒤 나지막한 산속에 자리잡은 쿤사의 옛 본부를 쿤사박물관이라 이름 붙여 세상에 내놨다. 연병장에는 말 탄 쿤사 동상을 세웠고, 병영 한쪽에는 쿤사의 샨주 독립투쟁을 기리는 온갖 사진과 안내문도 붙여두었다. 그리고 쿤사는 섬뜩한 기운이 도는 어두컴컴한 옛 사무실에 밀랍인형으로 앉아있다.

인도차이나 현대사에서 가장 큰 논란을 몰고 다닌 인물이었던 쿤사는 사라지고 없지만, 반힌땍 사람들은 오늘도 떼이친처럼 쿤사에게 경의를 표한다. “쿤사는 샨주 독립 위해 싸웠다. 쿤사 시절엔 요즘처럼 먹고 살기 힘들지 않았다. 다들 그 시절이 좋았다고 한다.”

‘아편왕’과 ‘독립투사’, 이 화합할 수 없는 두 이름을 달고 다닌 쿤사의 일생은 여전히 버마-타이 국경의 현실이기도 하다. 쿤사 뒤를 이어 세계 최대 마약군벌로 떠오른 연합와주군(UWSA)은 와주 독립을 내걸고 버마 정부군과 싸우고 있다.

※필자의 요청으로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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