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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파노이 아카 마을 들머리에 세워진 성당, 타이 국기 및 국왕 사진은 이 마을 변화의 상징이다. 본디 이곳은 전통의 상징인 ‘노콩’(아카 문)이 서 있어야 할 자리다.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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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문태의 국경일기 ③ 반파노이 아카의 ‘변신’
25년만에 찾아간 반파노이 아카 마을
산악 소수민족 ‘아카’ 사람들의 삶터
전통 상징 ‘노콩’ 있던 자리엔 성당이
“마을 주민 100%가 카톨릭 신자다”
시민증도 없는 ‘외계인’ 신세 탓에
‘고립적 공동체’라는 서구적 시선
의료·교육 내세운 ‘개종’ 공세 펴
대물림 ‘전통’ 사라지고 공동체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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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파노이 아카 마을 들머리에 세워진 성당, 타이 국기 및 국왕 사진은 이 마을 변화의 상징이다. 본디 이곳은 전통의 상징인 ‘노콩’(아카 문)이 서 있어야 할 자리다.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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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심리적 효과는 희한하다. 해는 아직 땅위로 안 솟았지만 상상만으로 따스함을 느끼며 편안해졌다.(…)내 운명이 여행과 맞아떨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스물셋 먹은 미래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 남긴 말이 떠오르는 새벽이다.
국민당 잔당 제5군 본부였던 도이 매살롱을 떠나 반힌땍으로 달리는 산길, 찬 기운에 움츠러든 내 몸은 해를 그리워하는 사이 서서히 펴졌다. 그리고 열 살짜리 아이의 꿈도 되살아났다. 그 아이한테 여행가 김찬삼의 <끝없는 여로>는 등불이었고, 형이 받아보던 <내셔널지오그래픽>은 망원경이었고, 누나의 지리부도는 길잡이였다. 세월이 흘러 그 아이가 날마다 고쳐 그리던 세계일주 계획도는 기억에서 사라져버렸지만, 그 꿈은 늘 국경 골짜기를 돌아다녔다.
애초 국경은 내가 가야할 운명 같은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을 취재한답시고 얻은 거창한 이름 ‘국제분쟁전문기자’란 것도 따지고 보면 국경에서 비롯되었다. 여태 내가 취재한 40여개 전쟁과 분쟁이 거의 모두 국경을 끼고 벌어졌으니 내 직장이 국경이었던 셈이다. 사실은 외국 기자가 한 나라 국경을 안 거치고 오를 수 있는 전선이란 건 이 세상에 없다. 근데 전쟁이 터지면 어디든 국경은 자동 폐쇄고, 전선기자들한테는 그 국경 돌파가 반드시 거쳐야하는 통과의례가 되고 만다. 전선기자 급수를 국경 뚫는 재주로 매긴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내 뇌가 인식하는 국경은 언제나 몰래 뚫고 들어가야 하는 장애물이었고, 내 몸엔 늘 ‘불법 월경자’ 딱지가 붙어 다녔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어디든 국경 가까이만 가면 남달리 긴장하는 버릇이 있다. 이번 여행만 해도 그렇다. 관광객들이 편히 드나드는 국경 지역을 ‘합법’ 신분으로 다니면서도 쓸데없이 뻣뻣해지는 걸 보면. 내 직업적 경험이 모든 국경을 ‘적진’처럼 느끼도록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먼지 날리던 앞길엔 깔끔한 포장도로가
여행에 묶인 꿈과 운명이 국경 산길 위로 들쑥날쑥 하는 사이 50분이 훌쩍 지났다. 도이 매살롱에서 북쪽으로 28킬로미터 떨어진 반힌땍이 발에 차였다. 하루를 여는 시장통에서 갓 따온 버섯으로 출출한 아침 배를 채운 뒤, 해묵은 기억을 더듬어 반파노이 아카란 마을로 달려갔다. 반힌땍에서 북서쪽으로 기껏 2킬로미터 떨어진 이 마을을 콕 찍어주는 사람이 없어 갔던 길을 두 번씩이나 되돌아가며 물어물어 찾아냈다. 꼭 25년 만이다. 산악 소수민족 아카 사람들이 삶터를 다진 이 마을은 그 사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누런 먼지를 날리던 마을 앞길엔 깔끔한 포장도로가 났고 집집마다 현대식 물탱크에다 위성안테나가 걸렸다. 어디를 둘러봐도 25년 전 자취를 찾기 힘들다. 그나마 어렴풋이 짚을 수 있는 건 마을 생김새뿐이다. 비탈 아래쪽 물길과 안장처럼 생긴 지형은 아카 사람들이 마을을 지을 때 반드시 따지는 두 가지 조건인데, 이 마을이 그 전형적인 모습을 지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까닭이다.
반파노이 아카는 버마 샨주에서 온 아카 사람들이 1982년에 지은 마을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카짜우(아카 전통 문화와 신앙)도 사람도 달라졌다. 오늘 이 마을에는 아카(80%)에다 중국 윈난 사람(10%), 버마 샨 사람(5%), 소수민족 라후(5%)가 뒤섞여 살고 있다. 115가구에 주민 735명이라면 골짜기치고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을이다.
이 마을 변화는 이탈리아 출신 하느님이 이끌었다. 마을 들머리에 버텨 선 콘크리트 성당, 본디 여기는 ‘노콩’이 서 있어야 할 자리다. 우리말로 ‘아카 문’쯤이라 부를만한 이 노콩은 아카 사람들이 마을마다 들머리에 세워 현실세계와 정신세계를 가르는 살피로 삼아왔다. 문 안쪽 마을은 사람들 몫이고 문 밖 숲은 혼령 몫이란 뜻이다. 그 속내가 마을 표시이자 마귀나 병을 쫓는 수호신인 걸 보면 우리 장승과 한 뿌리가 아닌가 싶다. 노콩 옆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남여 한 쌍을 세워 아카 마을임을 알려왔다. 아카 마을 어디든 이 노콩이 사라졌다는 건 전통과 헤어졌고, 달리 기독교(가톨릭 포함)가 파고들었다는 신호로 보면 틀림없다. 기독교와 전통문화가 함께 살 수 없다는 건 아카뿐 아니라 모든 소수민족 마을들이 하나 같이 겪어온 실화다. 적어도 타이 산골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 마을 주민 100퍼센트가 가톨릭 신자다.” 반파노이 아카 촌장 떼찐(35) 말을 들을 것도 없이 눈이 먼저 알아차린다. 아카하면 때깔 고운 전통 옷인데, 이 마을에서는 100% 사려져버렸다. 눈 닦고 뒤져봐도 전통 옷을 걸친 이가 없다. 메시아 신화가 한 마을을 통째로 삼켰다는 뜻이다. 떼찐은 “여자들이 전통에 맞춰 제대로 차려입고 은으로 치장하려면 17만 밧(560만원)이 든다. 그 무게만도 6~7킬로그램이다. 그런 게 이젠 안 맞다”며 웃어 넘겼다. 현실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카 사람이 아카 전통을 마다하고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다는 건 가히 혁명적 변화다. 아카짜우를 목숨처럼 여겨온 아카 사람들은 숱한 소수민족 가운데도 가장 고집스레 전통을 지켜온 이들이다. 25년 전 이 마을을 찾았을 때만 해도 거의 모두가 전통 옷을 걸치고 있었다. 수천 년 입었던 옷을 기껏 한 세대 만에 벗어던진 셈이다.
티벳 쪽에서 중국 윈난을 거쳐 버마, 라오스, 타이로 흘러온 아카는 본디 조상과 정령을 함께 모시는 남다른 믿음을 지녀왔다. 기록으로는 아카 사람들이 처음 타이에 정착한 곳이 여기 반힌땍 지역이다. 그게 1903년이었다. 오늘날 타이 북부에는 어림잡아 7만여 아카 사람들이 320개 마을 지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반이 넘는 이들이 주로 미국 기독교 감리회나 가톨릭으로 갈아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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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고집스레 전통을 지켜온 아카 사람들도 현대화의 물결 앞에 그 전통을 벗어던지고 있다. 이제 관광객을 상대하는 이들 말고는 이런 전통 옷을 걸친 사람을 보기 힘든 실정이다. 아카 퉁유아 마을. 1993년.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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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아카 마을 들머리에 서 있는 ‘노콩’(아카 문)은 마을 경계를 나타내고 마귀와 병을 막는 수호신 노릇을 해왔다. 그 밑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남여 한쌍을 세워 아카 사람이 사는 마을임을 나타냈다. 아카 퉁유아 마을. 정문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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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정치가 부딪쳐온 소리 없는 전선
“소수민족들이 선교사가 들고 온 의료나 교육 지원을 받아들였을 뿐 신앙심까지 넘겨줬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더라도 정신과 문화를 이끌어온 제사장들이 설 자리를 잃으면서 머잖아 전통이 끊겨버릴 것이다.” 치앙마이대학 문화인류학 교수 짜얀 왓다나푸띠가 오래 전부터 해왔던 경고다. 혼을 글로 적을 수 없다는 믿음이 강한 아카 사람들은 조우마(제사장)의 대가 끊겨버리면 춤, 노래, 옷에서부터 잔치나 제사에 이르기까지 전통을 이어 갈 수 없다는 말이다. 이건 창조주한테 물소 가죽에 적은 ‘아카 책’을 받아오던 선조가 배고파 먹어버린 뒤 영영 찾을 수 없다는 이른바 ‘잃어버린 책’ 신화와 이어져 있다.
그래서 아카헤리티지파운데이션을 비롯해 수많은 소수민족 연구자들이 아카를 우상숭배자로 몰아붙이며 전통문화 말살을 선교정책으로 내세운 기독교를 향해 핏대 올려왔다. 그러나 달라질 낌새는 어디에도 안 보인다. 오히려 타이-버마 국경 지역에는 개인보다 마을 단위 개종을 목표로 삼은 전체주의 선교정책이 더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다. 타이 북부 산골에서 맹위를 떨치는 한국 기독교 선교단체도 한 몫 톡톡히 해왔다.
아무도 아카한테 아프고 못 배우는 삶을 우길 수 없듯이, 누구도 아카 전통을 깨뜨리고 짓밟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의료와 교육은 선교사가 들고 다녀야 할 무기가 아니라 시민을 돌봐야 할 정부의 손이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국경 소수민족을 끼고 종교와 정치가 부딪쳐온 소리 없는 전선이다.
불교국가를 자랑해온 타이 정부는 그동안 종교 자유를 내걸고 기독교 선교에 눈 감아왔다. 그렇더라도 경찰이 갖가지 꼬투리를 잡아 선교사를 잡아 가뒀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뜨는 걸 보면 속앓이를 해왔다는 뜻이다. 실제로 정부 쪽 사람들을 만나보면 선교사들이 소수민족과 타이 전통을 깨트린다며 대놓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한다. 근데 타이 정부는 답이 빤히 나와 있는 문제를 놓고 투덜거리기만 해온 꼴이다. 아카를 비롯한 소수민족들을 차별 없이 똑 같은 시민으로 대접하고 선교단체들 대신 의료와 교육 지원을 하면 저절로 풀리는 문제다. 절실함이 사라진 땅에는 어떤 종교든 선교가 안 먹힌다는 게 인류의 경험이다.
지금 타이의 소수민족을 다 합친들 겨우 1백만이다. 7천만 시민을 지닌 정부가 그 1백만을 못 거둘 까닭이 없다. 그렇다고 법이나 정책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래전부터 타이 정부는 소수민족을 시민으로 인정해 온갖 보호 정책을 내걸었다. 작동하지 않을 뿐이다. 치앙라이를 비롯한 지방정부는 그 시민증을 놓고 까다롭게 굴며 돈을 요구해왔다. 그래서 겉보기엔 여느 타이 마을과 다름없는 반파노이 아카 마을도 속살을 파보면 반이 넘는 사람들이 시민증도 없는 정체불명 외계인으로 살고 있다. 시민증도 없는 마당에 병원과 학교는 다른 별 이야기다.
마을 젊은이 10%가 외국으로 떠나
이러니 서양 연구자들이 소수민족을 ‘국가 체제 거부하는 고립적 공동체’로 규정하게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타이 정부였다. 시민증도 못 받는 이들이 국가 체제를 어떻게 인정할 것이며, 시민증 없이는 바깥 나들이도 못하는 이들이 고립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기독교는 이 서양 연구자들 논리를 마을 단위 개종이라는 무시무시한 선교 전략 밑천 삼아 소수민족을 파고들었다.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절박한 땅, 국경 사각지대는 어디든 낯선 신이 달려들기 마련이다. 그 낯선 신 앞에서 국경 사람들은 대물림해온 전통을 벗어던지고 새 삶을 맹세한다. 그 대가로 신이 내린 선물 ‘변화’를 받아든다. 반파노이 아카 마을의 오늘이다.
“우리 마을 사람 마흔 명이 한국, 타이완, 이스라엘에 일하러 갔다. 나머지는 다 방콕이나 치앙마이로 나갔고. 나도 세 달 뒤 한국 간다.” 촌장 떼찐은 요즘 모바일 폰 번역기로 한글 배운다고 난리다. 그이 아내는 인터뷰 내내 한 귀퉁이에 서서 라인으로 인천에 산다는 사촌과 열심히 통화했다. 이게 치앙마이인지 산골 소수민족 마을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한 마을 젊은이 10%가 외국 가서 살고, 시민증 받은 이들은 모두 대도시로 떠났다. 반파노이 아카는 고립이 풀린 단계가 아니라 이미 공동체 해체로 접어든 느낌이다.
마을을 되돌아 나오는 내 얼굴로 땡볕이 달려들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반파노이 아카 마을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되풀이 했다. 아지랑이인지 허깨비인지 가물거리는 성당 앞에서 뒤돌아보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안타까움과 애달픔만 남길 바에야.
반파노이 아카도 나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필자의 요청으로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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