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당 잔당 제3군 사령관 리원환 장군의 딸 빠우라니 차이시리는 웃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속사포로 쏘아댔지만 빈틈이 없었다. ‘장군의 대변인’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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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리원환 장군의 딸’ 빠우라니 차이시리
국민당 잔당 제3군 사령관 리원환 장군의 딸 빠우라니 차이시리는 웃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속사포로 쏘아댔지만 빈틈이 없었다. ‘장군의 대변인’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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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사업 주무르는 여걸 꼽혀
리원환의 ‘검은 돈’에 대해선 ‘침묵’
“본질 빼놓고 마약꾼으로만 몰았다 “당신이 그 시절 아버지였다면…” 옛날이야기에 그는 좀 누그러지는가 싶더니 “딸로서 아버지의 마약사업을 어떻게 생각하나?”란 질문에 또다시 핏대를 올렸다. “아무도 우릴 안 도와줬다. 아버지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싸웠고 군대를 먹여 살려야 했다. 이런 산속에서 그(아편) 말고 달리 어떤 게 있었겠나?” 그는 억울한 듯 “당신이 그 시절 아버지였다면 어떻게 했겠나?”며 기자를 몰아세웠다. 듣다 보니 이건 비밀전쟁과 마약의 공생관계를 포장할 때 저마다 들이대는 아주 고전적 논리였다. 그렇게 해서 전쟁이 끝나고도 자손대대 부를 누리는 게 마약의 정치경제학이다. 그 시절 거의 모든 국민당 잔당 지도부와 쿤사를 비롯한 마약 군벌들이 그랬듯이 리원환 장군도 치앙마이에 터를 잡고 사업판을 벌였다. 골든트라이앵글 마약 폭증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 정부는 1972년 치앙마이에서 아편 26톤을 불태우며 ‘쇼’를 했고 그 대가로 국민당 잔당한테 1백만 달러를 뿌렸다. 그날 리원환 장군은 아편에서 손을 씻는다고 선언했다. 그즈음 아편에 콩과 온갖 잡것들을 섞어 태웠다는 의혹 못잖게, 리원환의 은퇴도 두고두고 말들이 많았다. 다만 1980년대까지도 마약을 비롯한 온갖 검은 돈들이 몰린 치앙마이가 인도차이나의 비밀금고 노릇을 했던 것만큼은 또렷한 사실이다. 그 돈줄은 지금도 치앙마이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호텔, 유흥업소, 보석상, 여행사, 부동산 업체들에게로 대물림하고 있다. 스스로 ‘역사의 희생자’라 여긴 지도부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돌아온 장군의 딸 빠라우니는 공식적으로 보석상이 주업인데 ‘태국치앙마이중화상회영원명예주석’이란 직함에서 드러나듯 치앙마이 사업판을 주무르는 여걸로 이름을 날렸다. 빠라우니는 몇 해 전부터 국민당 잔당 제3군 본부 터에 식당을 차리고 옛 병영을 호텔로 만들어보겠다며 땀응옵을 드나들고 있다. “우린 다르다. 본디 아버지가 중국에서 돈과 은괴를 갖고 나왔다. 국민당 지원을 받으며 편하게 온 도이 매살롱 돤 장군과 달리 아버지는 당신 돈으로 군대를 먹여 살리며 갖은 고생을 했다.” 그의 입에서 기다렸다는 듯 돤 장군 이름이 튀어나왔다. 경쟁심의 대물림인가? 제5군 사령관 돤시원 장군은 리원환 장군과 같은 전선을 달렸지만 서로 적대적 경쟁자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국민당 정규군 출신(돤시원)과 지역 군벌 출신(리원환)이라는 태생적 차이가 갈등의 뿌리였다면, 마약선을 낀 두 진영의 패권 다툼은 그 몸통이었다. “내친 김에 사나웠던 둘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 “(손사래 치며)사실 아니다. 둘은 아무 문제 없었고, 1981년 돤시원 장군이 죽기 10년 전쯤부터는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쪽이 어려울 때 우리가 돈도 보태줬고.” 으르렁댔던 두 진영이 돈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는 건 어떤 사료에도 없는 이야기였다. “근데, 그 돈을 당신이 어떻게 아나?” “내가 왜 몰라. 아버지 자금 관리를 내가 했는데.” “그러면 비밀스런 온갖 속살들 다 알고 있겠네?”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작은 돈들만 만졌을 뿐.” 그는 빙그레 웃으며 흘려 넘겼다. 요리조리 캐물었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입만 열게 할 수 있다면 현대사의 ‘보물덩어리’를 만난 셈인데, 못내 아쉬웠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마약 멍에를 지닌 국민당 잔당 지도부는 흔히 자신을 역사의 희생자라 여겼다. 쁘라우니도 그랬다. 그러나 진짜 희생자들은 따로 있다. 중국 내전에서 열대여섯 살 철부지로 영문도 모른 채 국민당 쪽에 줄 섰다가 한평생 반공전선 용병으로 끌려 다닌 이들이다. 그 가운데 가족도 없이 쓸쓸히 사라져가는 전상자들이 있다. 홀아비 전상자를 수용한 ‘룽민즈자’ “룽민즈자(榮民之家) 사람들을 왜 안 돌보나?” “어리석은 이들이다. 새 옷이라도 갖다 주면 금세 술로 바꿔버리고. 어머니가 명절 때마다 많이 도왔다. 근데 그 짓들을 해버리니.” “밥만으론 살 수 없고, 명절만 인생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인생이거늘….” 탐응옵에서 산을 내려가 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반마이농부아란 마을이 있다. 그 마을 어귀 산봉우리 108계단을 오르면 깨지고 낡아빠진 수용소 건물 네 채가 나타난다. 한때 홀아비 전상자 100여 명을 수용했던 룽민즈자다. 2004년 취재 때만해도 43명이 살아있었는데 13년 세월에 휩쓸려가고 이제 열 명만 남았다. 그들을 반공전선 용병으로 부려먹었던 미국, 타이완, 타이 정부는 애초 눈길 한 번 준 적 없다. 그동안 타이완 자선단체가 다달이 한 사람 앞에 500바트(1만6500원쯤)를 보태준 게 전부다. 2004년에도 500바트였다. 1972년 타이공산당 박멸작전 때 지뢰를 밟아 한 쪽 다리를 잃은 차오징왕(73)은 “쌀 사면 끝이다. 어쩌다 아는 사람들이 찬거리를 보태준다”며 13년 전과 똑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살아있는 게 기적이었다. 같은 동네 한복판에 멋들어지게 우뚝 선 리원환 장군 추모관과 귀신이 나올 법한 룽민즈자 사이에는 결코 변명하면 안 될 일그러진 국민당 잔당사가 흐른다. “왜 리원환 장군 무덤을 탐응옵이 아닌 반마이농부아에?” “거기 땅을 아버지가 모두 사서 마을로 개발 했으니까. 여긴 너무 외지고 교통도 힘들고 해서.” 쁘라우니 말처럼 리원환 장군은 한 마을을 통째로 사고 지을 수 있는 부와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근데, 왜 자신을 따라 일생을 전선에 바친 수많은 ‘차오징왕들’을 지켜주지 않았을까? 세계 전쟁사는 늘 이런 비극적 결함을 안고 시시껄렁한 의문을 남긴 채 끝났다. 장군의 딸은 “아버지가 자랑스럽다”며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차오징왕들’은 자랑거리도 흘릴 눈물도 없었다. 국민당 잔당사는 온갖 핑계만 남긴 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탐옹읍(타이-버마 국경 마을)/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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