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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13 14:13 수정 : 2018.02.02 17:47

리원환 장군이 이끌던 국민당 잔당 제3군 본부 모습.

[토요판] 커버스토리
정문태의 국경일기 - ① 타이-버마 국경 마을 탐응옵




리원환 장군이 이끌던 국민당 잔당 제3군 본부 모습.

1990년부터 타이를 근거지로 삼아 일해온 국제분쟁전문기자.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코소보를 비롯한 40여개 전선을 뛰며 압둘 라흐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대통령,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 등 최고위급 정치인 50여명을 인터뷰했다. 저서로 <전선기자 정문태 전쟁 취재 기록> <현장은 역사다> <위험한 프레임>이 있다. 매주 우리가 몰랐던 국경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버마와 국경을 맞댄 타이 산골 마을 탐응옵.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고 찾는 이조차 거의 없는 이 외진 마을이 아시아 현대사를 소리없이 흔들어놓은 현장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안겨준다. 중국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의 국민당 잔당이 1950년 초 버마 국경을 넘으면서부터 아시아 현대사에 무장 유랑민이 등장한다. 국적 없는 국민당 잔당은 버마, 중국, 타이, 라오스 국경을 들락거리며 인도차이나 지역 안보를 뒤흔든다. 세계 최대 마약 생산지로 악명을 떨친 골든트라이앵글을 쥐고 국제 마약시장을 폭발적으로 키운 것도 그들이다. 그사이 냉전은 극에 달했고, 미국과 타이, 타이완 정부는 국민당 잔당을 저마다 반공용병으로 활용하며 온갖 비밀전쟁에 투입했다. 그 대가로 국민당 잔당은 탐응옵을 비롯한 타이~버마 국경지역 정착 면허증을 받았다. 40년을 웃도는 세계 최장기 반공전선을 형성했던 국민당 잔당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비밀전쟁의 역사도 국경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국경은 인종, 문화, 종교, 환경, 빈곤, 인권, 자원, 노동, 무역, 영토, 주권 문제를 비롯한 모든 분쟁의 진원지가 되었다. 국경선은 ‘분리’와 ‘단절’이라는 인류사적 현상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라 할 국경은 늘 강대국과 주류사회의 이권에 따라 왜곡되고 비밀과 음모로 얼룩졌다. 피해는 오로지 국경 사람들의 몫이다. ‘정문태의 국경일기’란 이름으로 먼 길을 떠나는 까닭이다.

탐응옵의 국민당 제3군 본부 터. 정면에 보이는 작은 집을 리원환 장군이 본부 겸 숙소로 썼고, 왼쪽의 기다란 집이 사무실이었는데 현재는 리원환 장군의 딸 빠라우니가 식당으로 만들었다. 가운데 마당이 연병장이었다. 본부 건물 맞은편에 있던 병영(사진에는 보이지 않음)은 ‘탐응옵 인’이라는 호텔로 꾸몄지만 장사가 안돼 문을 닫은 상태다.
“추아 젯 티 디 젯 혼.”

타이 사람들이 즐겨 쓰는 이 속담은 우리말로 “일곱 번 나쁘고 일곱 번 좋다”쯤 될 법한데, 원치 않는 일을 당했을 때 달래거나 이겨내겠다는 속뜻을 지녔다. 약속 시간 50분이 지나서야 나타난 운전기사. 성난 새벽을 가라앉히고자 뽑아든 화두였다. 겨울로 접어든 12월, 새벽 공기가 제법 찼다. 운전기사는 아예 두툼한 털옷을 걸쳤다. 겨울이라고 해야 낮엔 30도를 오르내리고 아침저녁엔 기껏 15~20도 정도의 기온이지만 아열대가 몸에 밴 타이 사람들은 오그라들만도 했다.

국경을 향해 달리는 새벽길, 세상은 아름다웠고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 없는 방랑자 팔자를 한없이 고마워했다. ‘국경’과 ‘새벽길’, 이 둘은 G(집시)형 피를 지닌 내가 데리고 다녀야 할 숙명 같은 게 아니었던가 싶다.

아시아 현대사의 비밀무대

타이 북부 치앙마이에서 북쪽으로 국도 107번을 타고 두어 시간 달린 뒤, 타이 최북단 도로 가운데 하나인 국도 1340번을 따라 왼쪽으로 버마 국경을 끼고 1시간쯤 더 가면 탐응옵이라는 아주 작은 산골마을이 나타난다. 산악 관광지로 이름난 도이앙캉(1928미터) 남쪽 16킬로미터에 터를 다진 이 마을은 지도에도 없고 눈여겨보는 이도 없다. 마을 들머리에 열두어 가게들이 차니 머루니 꿀을 차려놓고 길손을 기다리지만, 멈췄다 가는 자동차는 드물다. 그저 도이앙캉을 오가며 뒤가 급한 이들이 잠깐 머물다 갈 뿐. 하기야 길손을 붙들어 둘 만한 별난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없는 산골인데다 100여가구 600여 남짓한 사람들이 1천미터 웃도는 깊은 산속에 드문드문 흩어져 살다 보니 마을이 어디 있는지 한눈에 담기지도 않는다.

관광지 ‘도이앙캉’ 남쪽의 외진 마을
1000미터 산속에 600여명 모여 살아
지도에도 없고 찾은 이도 드물지만
국민당 잔당 제3군 본부 역사 서려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도망친 뒤
일부는 윈난성 국경 넘어 버마로 탈출
‘마방’ 이끌던 리원환도 잔당에 합류
CIA 도움으로 잔당 세력 몸집 키워

“마땅한 일거리도 없고 일손도 없다. 젊은이들은 다 치앙마이나 방콕으로 나가버렸고 노인네들이 나물 캐고 머루 따서 먹고 산다.” 방콕에서 닥치는 대로 일하다 그나마 관광객이 지나다니는 12월쯤 마을로 돌아와 두어 달 장사를 한다는 아메이(36) 말마따나 사람 냄새도 맡기 힘든 맥 빠진 마을이다.

이 외진 산골마을 탐응옵이 한때 아시아 현대사의 비밀무대였고 엄청난 돈줄을 굴렸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마을 사람들도 그 속내를 모르긴 마찬가지다. 기껏 30~40년 전 역사가 이토록 야무지게 가려진 경우도 흔치 않다. 미국·타이완·타이 정부를 낀 비밀전쟁과 그 밑천이었던 마약이 한데 어우러진 탓이다. 탐응옵은 호사가들이 이른바 “잃어버린 군대”니 “잊어버린 군대” 따위로 감상을 섞어 불러온 장제스의 국민당 잔당 가운데 제3군이 본부를 차렸던 곳이다. 애써 감춰왔을 뿐, 국민당 잔당은 한순간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린 적 없는 아시아 현대사의 첫 용병이고 멍에였다.

1960년대 말에 촬영한 이 사진은 국민당 잔당 제2차 송환 뒤 공식적으로 관계를 끊었다는 장제스가 여전히 타이 국경에 진을 친 국민당 잔당을 지원하며 반공 용병으로 부려먹었던 사실을 증명한다. 가운데 앉은 이가 장제스이고, 뒷줄 왼쪽에서 4번째가 국민당 제3군 사령관 리원환 장군, 5번째가 5군 사령관 돤시원 장군. 친이후이 제공
1960년대 탐응옵에 진을 친 국민당 잔당 제3군 본부에서 병사들을 사열하는 리원환 장군. 친이후이 제공
국민당 잔당이 생산한 아편 수송 도와준 CIA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장제스의 국민당은 8년에 걸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었던 공산당의 민중연합정부 창설 요구를 마다한 채, 이듬해인 1946년 6월부터 오히려 공산당 해방구를 무차별 공격했다. 이에 맞서 마오쩌뚱은 인민들의 지원을 받으며 반격에 나섰다. 1949년 1월 베이징을 점령한데 이어 항저우, 우한, 상하이를 비롯한 국민당 주요 거점들을 차례로 무너뜨린 뒤,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그해 10월14일 광저우를 잃은 장제스는 12월9일 쳉투에서 특별기를 타고 타이완으로 도망쳐 중화민국 정부를 세웠다. 장제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리미 장군이 이끈 국민당 제8군과 제26군(사령관 뤄궈추안), 그리고 93사단(사령관 펑청)은 인민해방군에 밀려 12월 말부터 윈난성 국경을 넘어 버마로 탈출했다. 그렇게 국민당 잔당이 태어났다.

국민당 잔당 제3군을 이끌었던 리원환 장군. 1951년 초 스물여섯 나이에 무장한 5백여 명을 데리고 잔당에 합류한 리원환에겐 한평생 반공투사와 마약왕의 이미지가 동시에 따라다녔다. 친이후이 제공
여기서 탐응옵의 주인공 리원환이 등장한다. 윈난성 천캉에서 버마, 타이, 라오스를 오가며 아편이나 차 같은 지역 산물들을 사고파는 이른바 마방(말 수송단을 낀 갱)을 이끌던 스물여섯 먹은 리원환은 1951년 초 무장한 500여 명을 데리고 버마 국경을 넘어 국민당 잔당에 합류했다.

한편, 1950년 초 동남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을 우려하던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합동참모본부(JSC)가 건의한 국민당 잔당 지원안을 승인하면서 극비리에 중앙정보국(CIA) 요원을 잔당 재조직과 지원 작전에 투입했다. 버마의 샨주 몽양에 본부를 차리고 ‘윈난반공구국군’을 결성한 리미 장군은 지역 소수민족을 끌어들여 1만 가까이 병력을 불렸고, 1951년 4월 무렵엔 버마의 살윈강에서 윈난 국경까지 세력을 넓혔다. 6월 들어 국민당 잔당의 불법 침입에 위기감을 느낀 버마 총리 우누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고, 밀려난 리미 장군은 타이 국경 쪽 몽삿에 새 본부를 차렸다. 그즈음 리원환과 국민당 잔당 지도부는 라후를 비롯한 국경 소수민족들을 을러메 아편 생산을 폭발적으로 늘려 군자금을 마련하고 부를 쌓아나갔다. 씨아이에이는 국민당 잔당이 생산한 아편을 자신들이 비밀스레 운영하던 에어아메리카로 몽삿에서 치앙마이를 거쳐 방콕까지 실어다주었다. 그 아편은 타이 정치판을 주물렀던 경찰 총수 빠오 시야논다의 비호 아래 홍콩, 미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퍼져나갔다. 1950년 연간 30톤이었던 버마 국경 아편 생산량이 국민당 잔당이 개입한 1950년대 중반 300~600톤으로 늘어났다. 훗날 ‘큰 아편’으로 불리게 될 리원환의 출발지였다.

1960년대 탐응옵에 들어선 국민당 잔당 제3군 본부 모습. 두 차례의 송환에도 제3군은 꿋꿋이 버텼다. 미국·타이 정부의 반공 용병정책 못잖게 잔당 지도부의 마약 돈줄도 영향을 미쳤다. 친이후이 제공
장제스의 타이완 정부는 1953~1954년과 1961년 두 차례에 걸쳐 국민당 잔당을 송환했지만 타이-버마 국경에는 여전히 4천여명 웃도는 잔당이 남아 인도차이나 지역 안보를 흔들어 놓았다. 1961년 국민당 잔당이 송환되는 모습. 친이후이 제공
중국 대약진운동 이후 국민당 잔당 몸집 불려

1951년 몽삿에 군수물자를 공수하던 씨아이에이의 C-46 수송기가 버마 정보부에 걸려든 것을 계기로, 우누 총리는 유엔에서 미국 정부의 국민당 잔당 비밀지원을 거세게 성토한데 이어, 1953년 국민당 잔당 사안을 다시 유엔으로 끌고 갔다. 트루먼의 후임인 아이젠하워는 국민당 잔당을 낀 버마와 중국의 밀월관계를 막고자 철수 결정을 내렸다. 유엔은 타이완 비난 결의안을 통과시킨 뒤, 버마·타이완·미국·타이 등 4개국 군사위원회를 구성해 국민당 잔당 송환 임무를 맡겼다. 1953~1954년 국민당 잔당 5770명과 관련자 880명이 타이완으로 떠났다. 1954년 5월30일, 리미 장군은 타이완으로 떠나면서 윈난반공구국군 해체를 선언했다. 그러나 여전히 버마 국경에 남은 국민당 잔당은 류위안린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내세워 제1군(사령관 뤼런하오), 제2군(사령관 푸징윈), 제3군(사령관 리원환), 제4군(사령관 장웨이청), 제5군(사령관 돤시원) 체제로 재편했다. 1년 뒤인 1955년엔 타이완으로 철수했던 국민당 잔당 가운데 6백여 명이 버마-라오스 국경으로 몰래 되돌아 왔고, 1958년 중국의 대약진운동을 피해 버마 국경을 넘은 이들까지 받아들이면서 국민당 잔당은 다시 세력을 불려나갔다. 그즈음 버마군이 타이완 정부 소속 미제 군용기(PBY)를 격추시켜 말썽이 일자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장제스한테 잔당 송환을 다그쳤다. 본토 수복 꿈을 접은 장제스는 1961년 봄 버마와 라오스에 진을 친 국민당 잔당 3371명과 관련자 825명을 타이완으로 송환하면서 “추가 지원 포기와 관계 단절”을 선언해 형식상 국민당 잔당과 선을 그었다.

국경소수민족 시켜 아편 재배한 뒤
CIA 통해 동남아 일대 퍼뜨려
국제 마약루트 90%를 손에 장악
‘돈줄’ 무기로 잔당 영향력 확대 노려

1960·70년대 베트남전쟁 와중엔
미국의 대 라오스 비밀전쟁과
타이의 공산당 박멸작전에 용병 역할
정착 허가와 특수군 코드네임 얻어

그럼에도 탐응옵에 진을 친 리원환 장군의 제3군 1400여명과 도이 매살롱에 터를 다진 돤시원 장군의 제5군 1800여명, 마쥔궈 장군의 제1독립부대 정보요원을 포함해 4천명 웃도는 잔당이 송환을 거부한 채 타이 국경에 남았다. 그 과정에서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이끈 국방부정보국(IBMND)은 철수 준비를 하던 돤시원 장군을 잔당 지도자로 임명하면서 “3개월 뒤(미국 눈길이 수그러들 때) 자금 지원 약속”과 함께 잔류 명령을 내렸다. 돤시원 장군과 리원환 장군은 숨 죽이며 때를 기다렸으나, 타이완 정부는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돤시원과 리원환은 독자적 생존을 외쳤고, 아편사업에 뛰어든 행위의 정당성을 찾으려 했다.

철책 너머 버마 정부군 코아후아론 기지와 마주보는 반노래 마을 앞 타이-버마 국경선. 강과 산악을 따라 1800킬로미터에 이르는 타이-버마 국경에서 두 정부군 기지가 마주보며 철책 경계선을 친 곳은 흔치 않다.
‘아편왕’ 쿤사와 골든트라이앵글 패권 경쟁

이처럼 산골마을 탐응옵은 미국, 중국, 타이완, 타이, 버마, 라오스를 낀 거대한 비밀전쟁 속에서 태어났다. 국민당 잔당사를 연구해온 친이후이 중앙연구원 중산인문사회과학연구소 교수는 두 차례 송환에도 제3군과 제5군이 버텼던 이유를 “장제스의 개입과 미국·타이 정부의 반공 용병정책 못잖게 잔당 지도부의 마약 돈줄”로 꼽았다. 냉전이라는 국제정치 환경과 마약선을 쥐고 있던 국민당 잔당의 이권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다. 실제로 국민당 잔당은 1967년 ‘아편왕’이라 불린 샨주 출신 군벌 쿤사와 골든트라이앵글 패권을 놓고 벌인 마약전쟁 끝에 국경 마약루트 90%를 손에 쥐었다. 그 시절 리원환 장군은 탐응옵에서 제3군 병력을 라오스 국경으로 파견해 돤시완 장군의 제5군과 함께 쿤사를 공격했다. 국민당 잔당이 주물렀던 골든트라이앵글은 세계 최대 마약생산지로 악명을 떨쳤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연간 60톤에 지나지 않던 인도차이나반도의 아편 생산량이 1970년대 중반 베트남전쟁이 끝날 무렵엔 1000톤을 웃돌았다.

냉전도 탐응옵의 운명에 얽혀들었다. 국민당 잔당 제3군과 제5군은 1960~1970년대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대 라오스 비밀전쟁과 1970~1980년대 타이 정부의 공산당 박멸작전에 용병으로 투입됐다. 그 대가가 바로 국민당 잔당의 타이 정착 허가였다. 그 때부터 제3군과 제5군은 중국비정규군(CIF)으로 이름을 바꿨고 타이 합참의장이 직접 통제하는 특수군 코드네임 ‘04’가 되었다. 그렇게 국민당 잔당은 1950~1980년대를 통틀어 ‘국제반공전선’과 ‘국제마약전선’이라는 쌍둥이전선을 달리며 아시아 현대사를 소리 없이 흔들어놓았다.

이제까지의 이야기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산골마을 탐응옵에 서린 질긴 역사다. 리원환을 비롯한 탐응옵의 국민당 잔당들은 흐르는 세월에 휘말려 하나둘씩 사라지고 이제 기억마저 왔다 갔다 하는 이들 너댓만 남았을 뿐이다. 오늘 그 탐응옵에는 할아비의 역사를 모르는 손자들이 모여 산다. 타이-버마, 타이-라오스 국경 지역에는 국민당 잔당의 후손 6만여 명이 60여개 마을을 일구며 살고 있다.

“일곱 번 나쁘면 일곱 번 좋다”고들 하니, 탐응옵 사람들의 건투를 빌며 저무는 해를 따라 국민당 잔당 제5군 본부였던 도이매살롱으로 서둘러 길을 떠난다.

탐응옵(타이-버마 국경 마을)/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전문기자

※필자의 요청으로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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