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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룩 마을 공동묘지에 있는 쌔와 5명의 자녀, 여동생을 합장한 무덤(오른쪽)과 막내 붕의 무덤. 쌔의 남편 봉이 재혼한 뒤 낳은 아들 꿍이 무덤을 살피고 있다. 원래 마을 논두렁 옆 공터에 묻혀 있다가 1987년 이곳으로 왔고, 2010년 비석을 세워 새단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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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퐁룩마을 흉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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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룩 마을 공동묘지에 있는 쌔와 5명의 자녀, 여동생을 합장한 무덤(오른쪽)과 막내 붕의 무덤. 쌔의 남편 봉이 재혼한 뒤 낳은 아들 꿍이 무덤을 살피고 있다. 원래 마을 논두렁 옆 공터에 묻혀 있다가 1987년 이곳으로 왔고, 2010년 비석을 세워 새단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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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 학살은 가장 기록이 풍부한 사건이다. 생존자는 물론 현장에 진입한 각 소대장들의 진술이 나왔고, 사진과 관련 문서까지 발굴됐다. 1969년 가을, 박정희 대통령 특명에 의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조사가 이뤄졌다는 증언도 있다. 여기에 새로운 기록 하나를 추가한다. 당시 한국군은 퐁니·퐁넛을 거쳐 서쪽으로 퐁룩까지 갔다. 쌔(응우옌티쌔)는 그 퐁룩 마을의 빈집에서 군인들과 맞닥뜨린 비운의 여인이다.
낮은 초가들 사이로 높고 붉은 기와가 돋보였다. 퐁룩 마을에 하나뿐인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었다. 기둥과 대들보에 최고의 목재를 썼다고 했다. 이웃집의 서너 배는 될 만큼 크고 웅장했다. 안채와 사랑채는 물론 별채까지 널찍했다. 부자의 자취가 밴 이곳은, 그러나 빈집이었다. 사람이 없었다. 쥐와 도마뱀, 벌레들만 들락거렸다. 주인 가족은 2년 전인 1966년, 위험을 피해 도시로 떠났다. 불안한 공기가 마을을 지배했다. 멀리서 매일같이 들리는 총성과 폭음은 언제 가깝게 다가와 사나운 얼굴을 들이밀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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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초의 퐁룩 마을 풍경. 마을 주민들이 밭을 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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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2월12일, 오전 11시. 빈집에 사람들이 들어찼다. 옆집에서 온 쌔(40)와 그녀의 자식들, 그리고 여동생까지 모두 8명이었다. 젖먹이가 포함된 일가족은 지하 방공호에서 숨을 죽였다. 밖에선 군인들이 마을을 뒤졌다. 쌔는 자신의 집을 빠져나온 터였다. 군인들이 초가지붕에 불을 붙일지 몰랐다. 부자 이웃이 버려두고 떠난 빈집으로 오는 편이 안전했다. 쌔는 그 집 방공호와 연결된 외부 입구의 위치를 알았다. 자신의 초가집과 기와집 사이에 쌓아놓은 거대한 짚단 부근의 한 지점이었다. 쌔는 살기 위해 이곳에 기어들어왔다. 바깥은 발걸음 소리로 어지러웠다. 쌔는 아이들을 달래 울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방공호의 정적이 깨어지는 순간, 장난일 수 없는 숨바꼭질 게임에서 패자가 되는 순간,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쌔.
그녀의 정확한 성명은 ‘응우옌티쌔’. 응우옌(Nguyen)은 베트남에서 가장 흔한 성이다. 한국으로 치면 원(阮)씨다. 티(Thi)는 여자한테만 쓰는 중간이름. 본래 ‘씨’(氏)라는 뜻이다. 계집애가 태어나면 따로 이름을 안 짓고 성 뒤에 씨만 붙여 부르던 봉건시대의 흔적이다. 쌔는 ‘바쌔’로 불리었다. ‘쌔 아줌마’라는 호칭이다. 그날 베트남 시골마을의 평범한 40살 여인 쌔에게 들이닥친 운명의 행로를 따라가 본다. 이후 49년이 흐르도록 아무에게도 주목과 관심을 받지 못했던 쌔와 그녀의 가족을 역사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세워본다. 쌔가 숨었던 빈집은 49년이 흐른 2017년 3월 현재에도 낡은 기왓장과 벽돌 구조물만 남은 빈집이다. 나뭇잎이 지붕까지 차오르고, 수풀이 우거져 흉가처럼 방치됐다. 베트남 중부지방의 그 빈집 하나가 오늘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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꽝남성 디엔반현 남디엔탕사 퐁룩 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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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마을을 차례로 통과한 해병들
쌔가 사는 퐁룩 마을은 내전의 한가운데 있었다. 8년 전인 1960년 12월 수립된 남부베트남민족해방전선(민족해방전선)은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부를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민족해방전선의 전위부대인 베트콩 유격대원들은 곳곳에서 남베트남 군대와 관리들을 공격했다. 북위 17도선 이북의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은 후방기지를 자임하며 남쪽의 민족해방전선을 돕겠다고 선언했다.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전쟁)의 시작이었다.
미국한테 남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전초기지였다. 미군은 1965년부터 남베트남에 지상군을 파병했다. 남베트남으로 간 미군의 수가 1968년에는 54만명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미국 편에 선 한국도 1965년부터 매년 5만여명의 군대를 보냈다. 한국군이 파병한 여러 부대 중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병력 4800여명이 퐁룩 마을 근처 호이안에 자리를 완전히 잡은 것은, 쌔가 빈집 방공호에 숨은 그날로부터 보름이 채 되기 전인 1968년 1월30일(1967년 12월22일부터 이동 시작)이었다.
귀신 이미지로 투사된 ‘응우옌티쌔’
퐁룩 마을 빈집을 50년째 떠돈다
주민들, 1968년 2월12일 비극 떠올려
유독 이 집의 부동산 거래만 힘들어
해병대, 구정대공세 맞서 괴룡작전
유령 같은 베트콩 찾아 우왕좌왕
1대대 1중대, 퐁니 부근서 저격받자
퐁넛을 지나 퐁룩 마을까지 휩쓸어
퐁룩 마을 여자들은 잘 숨었다. 쌔만 빼고는 그랬다. 르(37)는 집 방공호 바닥에 머리를 박고 몸을 은폐시켰다. 군인들은 그녀를 찾지 못했다. 소녀인 롱(14)은 잽싸게 침대 밑에 들어가 한참을 꼼짝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롱의 집 앞을 그냥 지나갔다. 총소리가 크게 나는 듯했다. 사위가 고요해진 뒤 주민들이 밖으로 나왔다. 빈집 앞 땅바닥에 쌔와 그녀의 가족들이 누워 있었다.
퐁룩 마을에서 동쪽으로 1㎞가량 가면 퐁넛 마을이 있었다. 퐁넛에서 동쪽으로 1㎞ 더 가면 퐁니 마을이었다. 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중대장 김석현) 병사들은 거꾸로, 베트남을 세로로 잇는 1번 국도변에서 퐁니를 지나 퐁넛을 거치고 퐁룩으로 온 길이었다. 퐁은 바람 풍(風)이었다. 베트남어로 퐁넛(퐁?)은 첫째 바람, 퐁니는 둘째 바람, 퐁룩은 여섯째 바람에 해당했다. 바람의 마을을 차례로 통과한 해병들은 각자 손에 M16 소총을 들었다. 실탄과 수류탄과 연막탄과 대검을 휴대했다. 분대에 하나씩 M79 유탄발사기를, 3명에 하나씩 로켓포를 소지했다. 30구경 기관총으로도 무장했다. 60㎜ 박격포가 따라다녔다. 육군 보병을 능가하는 화력은 해병들의 자부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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쌔가 죽음을 당한 빈집 앞에서 당시 쌔와 함께 한마을에 살았던 주민들이 증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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쌔의 마지막 순간을 봤다는 이는 없었다. 분명치 않은 목격담이 떠다녔다. 쌔가 소리를 내는 바람에 방공호에서 온 가족이 발각되고 말았다는 추측이 나왔다. 결국 빈집 앞으로 끌려나와 한 줄로 선 채 총알세례를 받았다는 짐작이었다. 쌔는 말이 없고 순하고 착하기만 했다. 150㎝쯤 되는 키에 마른 체형이었다. 아기를 낳은 바로 다음날에도 우렁이를 잡으러 논에 나갈 정도로 무모하게 근면했다. 뭔가 모자라는 구석도 있었다. 소학교(초등학교)를 나오지 않아 까막눈이었다. 쌔가 총명하다고 평하는 이들은 없었다. 8명의 주검에 돗자리가 덮였다. 마을엔 이들의 피붙이가 아무도 없었다. 쌔의 남편 봉(나이 미상)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일자무식의 머슴과 식모
봉은 30여㎞ 떨어진 도시 다낭에 나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대대로 머슴 집안이었다. 봉의 형제들도 머슴이었다. 봉도 그저 선하고 남과 다툴 줄 모르는 성품이었다. 쌔는 결혼하기 전 식모 일을 했다. 혼기가 찬 머슴과 식모가 만났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에서 가장 가진 것 없고 천한 일자무식의 남녀가 천생연분을 맺었다고 수군거렸다. 봉과 쌔 부부는 자식을 많이 낳았다. 루언(1954년생·아들), 응옷(11·딸), 벤(9·아들), 배(8·딸), 배(7·딸, 같은 이름의 2명을 큰 배, 작은 배로 구분했을 것으로 추측), 꾸(2·아들), 붕(1·아들)까지 4남3녀를 두었다. 장남 루언은 9살이던 1963년 소떼를 몰고 가다 부비트랩을 밟고 즉사했다. 나머지 3남3녀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68년 2월12일, 어머니 쌔, 이모 응옷(30)과 운명을 함께했다. 몰살의 운명.
마을에 들어온 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원들의 주적은 베트콩이었다. 베트콩을 잡겠다며 퐁룩 마을에 왔다.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설 휴전 약속을 어기고 베트남 전역에서 봉기한 구정대공세(?H 공세) 직후였다. 호이안 시내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해병 제2여단은 즉시 호이안과 퐁룩 마을이 속한 인근 디엔반현 일대에서 괴룡1호 작전에 돌입했다. “적의 주요 공격 목표였던 월남군(남베트남군) 진지의 방어와 행정관서를 보호하면서 적의 집결지와 잠복처를 강타한다”(<파월한국군전사> 4~5)는 작전목표를 세웠다. 그러나 적 베트콩은 어디에도 없었고, 어디에나 있었다. 유령 같은 존재였다. 주민들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호흡하는 유령은 가끔씩 저격을 통해 존재감을 입증했다. 해병대원들은 정처 없이 유랑했다. 상급 부대에서 정해주는 대로 좌표를 찾아 정찰을 나가는 식이었다. 긴장을 칼끝처럼 세웠다. 언제 유령의 총탄이 날아올지 몰랐다.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쌔는 퐁룩 마을의 논두렁 옆 들판에 묻혔다. 봉이 아내와 자식들, 처제를 위해 삽을 들고 땅을 팠다. 주검들은 온전하지 않았다. 기관총을 발사했는지 아내와 아이들은 폭파된 듯 산산조각 나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잘려나간 팔과 다리가 너덜너덜해진 채로 대나무에 걸려 있기도 했다. 봉은 젓가락으로 대나무 가지에 붙은 살점을 하나씩 떼어내야 했다. 오직 1살짜리 아기인 막내 붕만 깨끗한 몸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봉은 붕을 돗자리로 감아 따로 묻었다. 나머지 7명의 주검은 얼기설기 모아 하나씩 돗자리로 감았다. 얼굴은 구분이 어려웠다. 조각난 여러 명의 신체들이 하나의 돗자리 안에서 섞이고 엉켰다. 7명을 한자리에 모아 매장했다. 주검은 8구였지만, 무덤은 2개만 썼다.
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원들이 퐁니에서부터 마을 수색을 시작한 것은, 선두에서 정찰을 벌이던 1소대가 소총 저격을 받고 부상병이 발생한 직후였다. 근처 1번 국도 위에서는 합동작전을 위해 움직이던 미군 엘브이티(LVT: 수륙양용 장갑차)가 지뢰를 밟고 파손됐다. 미군 1명도 부상을 입었다. 1중대장은 1소대장에게 마을 진입을 명령했다. 1소대는 퐁니 마을에서 저격 용의자를 색출하려고 했다. 마을엔 노인과 여성, 아이뿐이었다. 1소대는 주민들을 집에서 나오게 한 뒤 뒤따라오는 2소대와 3소대 쪽으로 보냈다. 일부 해병대원들은 민가에 들어갔다가 지하 방공호에 숨은 이들을 발견하고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해병대원들도 두려움을 느꼈다. 긴급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파놓은 ‘방공호’였지만, 수색하는 군인들에겐 수상한 ‘땅굴’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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쌔가 1968년까지 살던 집 앞을 같은 마을 주민이었던 응우옌티르(왼쪽부터), 응우옌티니, 쩐티롱이 돌아보고 있다. 이 집은 쌔가 숨었던 빈집의 바로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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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한 귀신들이 출몰한다는 소문
총성은 갑자기 퐁니 마을에서부터 울렸다. 사람들이 쓰러졌다. 퐁넛에서도 사람들이 쓰러졌다. 초가집에 불이 붙었다. 화염에 휩싸인 두 마을에서 M16 소총을 다연발로 놓고 쏘는 소리가 한동안 지속됐다. 누군가는 머리가 통째로 날아갔고, 누군가는 몸이 벌집처럼 되어 공동우물에 던져졌다. 누군가는 칼로 난자당했다. 한 여성은 유방과 팔을 절단당했다. 퐁니와 퐁넛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60명을 넘어섰다. 퐁룩에서도 사람들이 쓰러졌다. 모두 10명이었다. 퐁룩은 북퐁룩과 남퐁룩으로 나뉘었다. 북퐁룩의 희생자는 2명이었다. 남퐁룩의 희생자는 8명. 모두 쌔와 그 가족이었다.
퐁룩 마을의 기와집도 방공호에서 발각된 쌔의 운명처럼 폭삭 무너져내렸다. 쌔가 세상을 떠나고 1970년쯤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 군대의 소행인지 모르지만, 폭격을 정통으로 맞았다. 빈집 건물 터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곳에 ‘요’라는 주민이 다시 집을 지었다. 1975년 남베트남 정부가 패망하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직후였다. 퐁룩 마을 내의 작은할아버지 집에 살던 요는, 1954년 제네바협정의 인구이동 합의(베트남 양쪽 정부가 서로 체제를 인정하고 북베트남 사람은 북베트남으로, 남베트남 사람은 남베트남으로 이주하도록 한 정책)에 따라 북으로 떠났던 작은할아버지 가족이 1975년 이후 마을로 돌아오자 새집을 찾아야 했다. 요는 황무지로 변한 기와집 터를 닦고 건물을 올렸다. 정원을 꾸며 꽃과 채소도 키웠다. 1975년 이전 자본주의 치하에서의 토지소유권은 소멸한 상태였다. 옛날 기와집의 소유주였던 칸이 뒤늦게 돌아와 새로 지은 건물을 자신에게 팔라고 요구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요는 찜찜했다. 새집을 짓고 살 때 마을에는 흉흉한 이야기가 떠돌았다. 원통하게 생을 마감한 귀신들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요의 집 주변에 출몰한다는 거였다. 쌔 가족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엉뚱한 소문을 빚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사실 빈집에 새 둥지를 틀고 사는 동안 요의 가족은 가난을 면치 못했고 별로 화목하지도 않았다. 요는 그것이 귀신 때문은 아닐까 의심을 해보기도 했다. 요는 1990년 형님이 사망하자 즉시 그 집으로 살림을 옮겼다. 15년 만이었다. 전쟁통에 부서지기도 했던 빈집은, 평화가 찾아온 뒤 다시 빈집이 되었다.
쌔의 남편 봉은 재혼을 했다. 가난한 삶은 바뀌지 않았다. 봉은 새 아내 드억(1923년생)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을 또 낳았다. 막내딸은 일찍 죽고 레(1971년생), 쭝(1976년생), 꿍(1978년생)이 남았다. 레는 쌔의 막내아들 붕과 세 살 터울이 졌다. 레가 아버지 봉을 따라 퐁룩 마을 들판의 쌔 무덤을 찾은 것은 16살이 되던 1987년의 일이다. 공동묘지로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논둑 옆 묘를 파내려갔다. 내부는 온통 민물 메기의 소굴이었다. 레는 이후 메기국과 메기조림을 절대 입을 못 댈 만큼 역겨움을 느끼며 충격을 받았다. 돗자리는 썩어 없어졌고 쌔와 자식들의 유골은 더욱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물에 떠다녔다. 1968년 2월 처음 묻을 때처럼, 붕의 무덤을 따로 쓰고 쌔와 나머지 5명의 자식, 여동생 등 7명을 합장했다.
부자 이웃이 두고 피난 간 기와집의
방공호 숨었다 발각된 쌔 가족 8명
모두 끌려나와 총알세례 받은 듯
남편 봉이 논두렁 옆 들판에 묻어
민물메기 소굴이 된 쌔 가족묘
남편 봉이 20년 만에 이장을 했다
쌔 사후에 태어난 이복 자식들은
40년 만에 묘 단장하고 비석 세웠다
봉은 1992년 세상을 떠났다. 재혼한 부인 드억도 2009년 남편 곁으로 갔다. 레는 늘 아버지의 전 부인 쌔의 묘가 마음에 걸렸다. 이장을 했다지만 너무 허름하고 초라했다. 한 끼 밥을 굶을지언정 혼령을 달래는 데 돈을 쓰는 게 베트남 사회의 문화이자 관습이다. 아버지의 전 부인이라고 다를 수 없었다. 레는 동생들과 상의해 쌔의 합장묘와 붕의 묘에 번듯한 비석을 세우고 보기 좋게 단장하기로 했다. 2010년이었다.
빈집의 소유주인 요도 2000년대 중반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60여㎡에 이르는 빈집의 소유권을 아들 답(1960년생)이 물려받았다. 답은 그 소유권 등기를 다시 요의 손자이자 자신의 둘째 아들 파이(1994년생)에게 이전했다. 답은 한때 이 집을 팔기 위해 부동산 중개소에 내놓았지만, 매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독 이 집의 부동산 거래가 쉽지 않은 이유를 그도 잘 알았다. 귀신 소문 탓이었다. 요가 형님 집으로 옮긴 1990년 이후 28년째 비어 있는 집이었다. 전쟁 당시 이곳이 빈집과 폐허였던 기간은 9년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 3배가 넘는 28년을 다시 빈집으로 보냈다. 마을 주민들은 흉가를 보며 쌔의 비극을 다시금 떠올리는 듯했다. 귀신의 이미지로 투사된 쌔는 50년째 빈집에 머물며 퐁룩 마을을 떠도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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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간이나 숨죽여 있었을까.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고 조바심을 냈을까. 어쩌다가 들켰을까. 마을에 들어온 군인들을 피해 빈집 지하 방공호에 숨어 있던 쌔와 그 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클레이로 표현해보았다. 김태권 만들고 이은경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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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9명, 어린이 26명, 여성 47명’
쌔.
그 이름은 퐁룩 마을에서 2㎞ 떨어진 퐁니 마을 입구의 ‘퐁니·퐁넛 사건 위령비’에 새겨져 있다. 퐁룩은 사건명에서 빠졌다. 당시 생존자와 희생자 유족을 조사했던 미군 당국은 퐁룩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 들어 디엔반현 문화통신청에서 사건을 기록할 때 비로소 퐁룩 희생자들이 명부에 등록됐다. 쌔는 74명의 사망자 명단 중 36번째다. ‘36 Nguyen Thi Xe, 1936, Phong Luc-Dien Thang.’ 퐁룩은 현재 남디엔탕사 소속이다. 쌔의 자식들 5명과 여동생도 위령비에 있다.(막내 붕은 없음) 각각 48번, 51번, 56번, 59번, 70번, 38번. 해병 제2여단 1대대 1중대원들은 무장한 베트콩 저격병을 때려잡겠다며 퐁니·퐁넛·퐁룩에 갔지만, 위령비는 통계로 말한다. ‘60대 이상 노인 9명, 0~10세 어린이 26명, 여성 47명.’
위령비로 들어가는 길엔 푸른 빈랑나무가 빼곡히 늘어서 있다. 빈랑나무 열매는 베트남의 소박한 전통 결혼예물이다. 쌔한테도 빈랑 열매를 받던 화사한 청춘의 시절이 있었다. 25살 때였다. 쌔가 봉과 혼인식을 치르던 1953년의 봄. 프랑스 식민지배 치하였다. 식모와 머슴의 결혼식에 그럴듯한 예복은 없었다. 신랑과 신부는 값싼 천으로 몸을 가렸고, 맨발이었다. 전통 관습에 따라 신랑 봉은 쩌우까우와 쌀로 만든 술 한 병을 들고 신부 쌔 집을 찾았다. 쩌우까우는 구장나무 잎인 라쩌우와 빈랑나무 열매인 꽈까우를 합한 말이었다. 거기엔 두 형제와 한 여자의 슬픈 사랑에 관한 전설이 스며 있었다. 구장 잎과 빈랑나무 열매를 합하고 거기에 석회를 발라 씹으면 처음에는 맵다가 달콤해졌다. 입에서 빨간 침이 나왔다. 그것은 빨갛게 변하는 부부 사이의 감정을 의미했다. 정열적인 관계의 상징이었다. 쩌우까우를 전한 봉이 쌔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며 평생의 반려자로 맞았다.
봉에게 받은 쩌우까우를 씹으며 빨간 침을 뱉던 25살 신부 쌔를 상상해본다. 40살 중년이 되어 아이들을 품고 빈집 지하 방공호에 숨어 낯선 군인들을 맞이하던 쌔의 상기된 얼굴을 상상해본다. 쌔는 정말 귀신이 되어 지금도 퐁룩 마을 빈집에 살고 있을까. 49년 전 마을을 찾은 낯선 군인들에게, 쌔는 귀신이 되어서도 묻고 싶을지 모른다.
‘당신들은 누군가요? 여기엔 왜 오셨죠?’
꽝남 남디엔탕(베트남)/글·사진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한베평화재단 후원계좌: KB국민은행 878901-00-009326 한베평화재단(문의 : 02-2295-2016)
※쌔(응우옌티쌔)와 빈집 이야기는 퐁룩 마을 주민들과 희생자 유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응우옌티르(86), 응우옌티니(79), 쩐티롱(63)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쌔의 남편 응우옌득봉(1992년 사망)이 재혼한 뒤 낳은 큰딸 응우옌티레(46·호찌민 거주), 둘째 아들 응우옌득꿍(39)과는 전화로 인터뷰를 하거나 만났다.
49년 전 일이라 기억이 엇갈리기도 했다. 쌔의 1살짜리 막내아들 붕(응우옌득붕)에 관한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응우옌티레는 아버지에게 전해 들었다며 “붕의 주검만이 온전해서 따로 묘를 썼다”고 했지만, 쩐티롱은 붕이 쌔의 여동생 응우옌티응옷(1938년생)의 태아라고 주장했다. 쌔의 남편 입장에서 처제가 임신 중이었던 아이는 혈족 관계상 다른 집안이다. 이런 이유로 붕만 나머지 7명을 합장한 무덤에 묻지 않고 가묘(빈 무덤)를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묘 이장에 참여한 가족 관계자의 증언을 우선 존중하기로 했다.
현재 퐁룩 마을 공동묘지에 있는 쌔의 묘비엔 사망연도가 1967년으로 기록돼 있다. 출생연도는 퐁니·퐁넛 사건 위령비의 1936년과는 달리 1928년으로 적혀 있다. 사망연도는 1968년이 맞다. 복수의 주민과 가족들에게 물어보니 묘비를 새기던 과정의 실수였다. 쌔의 출생연도는 묘비에 적힌 1928년이 정확한 것으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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